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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기념관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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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집 터
장석천(1903~1935)은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동년 7월에 귀향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지원하였고, 1927년 3월 졸업기를 당하여 성진회원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그는 동년 4월에 전라청년연맹 당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동년 3월, 광주내 각 학교의 졸업기에 임하여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초대하고 항일운동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나승규(羅承奎)·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소비조합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에 관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각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운동전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전국적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협의하였다. 동월 12일에는 서울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학생의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함께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소요배후조종자로 일경에 붙잡혀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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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안내판
장석천(1903~1935)은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동년 7월에 귀향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지원하였고, 1927년 3월 졸업기를 당하여 성진회원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그는 동년 4월에 전라청년연맹 당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동년 3월, 광주내 각 학교의 졸업기에 임하여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초대하고 항일운동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나승규(羅承奎)·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소비조합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에 관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각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운동전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전국적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협의하였다. 동월 12일에는 서울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학생의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함께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소요배후조종자로 일경에 붙잡혀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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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 흉상
송홍(1871 ~ 1949)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운인공은 한말에 일본인의 횡포를 제지코자 5차의 상소와 복합상소 일헌에게 체포되어 옥고 출사표와 귀거래사에 필적하는 명문의 복합상소문(한자 1334자) 을 올리고, 중국 망명 귀국 후 교육혁신방안의 제창 광주 농고 광주고보 등에서 교사생활 20여년 3.1운동때 격문을 지어 공포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일시 미국 망명 제자들에게 애국애족정신 민족의 얼을 고취시켜 1929년 드디어 광주학생독립운동 의거 15년 간의 고분당생활 8.15 해방 후 광주서중과 광주의대에서 국사학 강의 1949년 6월 18일 광주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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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순국지
김태원(1870~1908)은 대한제국기 전남 장성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별명은 김준(金準) 또는 김참봉,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이며 의병장 김율(金聿)의 형이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내다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김태원은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김태원은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김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때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소(호남의소)라고 부대이름을 바꾸어 일진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을 처단하였으며,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다. 1908년 5월 장성(長城)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으며 광주 어등산(魚登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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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기념비
최흥종(1880~1966)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오방은 그의 호이다. 1919년 3월 2일 광주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3월 5일에 일어난 학생단체의 제2의 독립만세시위에 찬동하고 동일 8시경 남대문(南大門) 역전에서 벌어진 대시위에 참가하여 시위하던 중 인력거에 올라서서 〈신조선신보(新朝鮮新報)〉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대한문(大漢門) 앞에서는 인력거에 올라서서 조선독립이라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흔들어 시위군중을 선도하며 지휘하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광주지회장을 역임하였고, 1927년 10월 29일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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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동 표성비
박현동(1886-1962)은 전라남도 광주군 와곡면(光州郡 瓦谷面)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공주·순창 등지에서 후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국운이 날로 기울어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게 되자 "근고팔도민서(謹告八道民書)"라는 격문을 각지로 띄웠다.박현동은 그 격문을 보고 면암 의진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하여 의병 200여 명과 총 20∼30정으로 무장하고 광주 수비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공주(公州)를 떠났다. 다시 전북 임실(任實)에서 의병 80여명과 총 50 정을 추가하고 면암의 근거지인 순창(淳昌)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4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광주·전주·공주 등지로부터 면암 의진을 저지하기 위해 집결한 진위대와 수비대를 상대로 순창 읍내에서 교전하였으나, 의진의 형세가 정비되기 전이었으므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련의 의병활동이 적에게 발각되어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밀계가 이루어지자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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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의적비(본량초등학교)
이기손(1877-1957)은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 나주, 함평)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호는 금재(錦齋), 용섭당(龍攝堂)이며 이칭으로는 연해(淵海), 금재(錦齋), 연해(淵海)로 불렸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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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렬 순절기적비
오상렬(1879-1907)은 을미사변 후 김산향교에서 여영소와 함께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오인섭(吳寅燮). 자는 기완(起完), 호는 의재(義齋). 전라남도 광산 출신.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이다. 1906년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전수용(全垂鏞) 등과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김태원을 의병장으로 하고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광산 대명동 산골에 무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고, 광주 무등산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2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나주 석문산(石門山)에서 5일간에 걸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뒤 광주 무등산, 함평 무동촌(無洞村), 나주 풍치(風峙)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나주군 대량면 용진산(勇珍山) 사호치(沙湖峙)에서 도통장으로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하여 4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는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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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렬 묘
오상렬(1879-1907)은 을미사변 후 김산향교에서 여영소와 함께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오인섭(吳寅燮). 자는 기완(起完), 호는 의재(義齋). 전라남도 광산 출신.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이다.1906년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전수용(全垂鏞) 등과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김태원을 의병장으로 하고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광산 대명동 산골에 무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고, 광주 무등산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2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나주 석문산(石門山)에서 5일간에 걸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뒤 광주 무등산, 함평 무동촌(無洞村), 나주 풍치(風峙)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나주군 대량면 용진산(勇珍山) 사호치(沙湖峙)에서 도통장으로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하여 4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는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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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마을(어등산의병 전적지)
이 마을은 박산마을, 또는 박뫼마을로 불리는 의병마을로 광주광역시 어등산 자락에 자리한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이자 학자 송천 양응정이 들어온 이후 ‘박산(博山)’, 또는 박뫼라고 불리게 된 이 마을은 유교의 전통윤리인 충(忠), 효(孝), 열 (烈)을 지켜온 양씨 가문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우리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의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 곳이다. 박산마을에 세워진 양씨삼강문은 제주 양씨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양응정의 아들인 양산숙이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고 정유재란 때는 양응정의 부인과 아들, 딸, 며느리 등 일가족이 왜적에게 굽히지 않고 자결했다. 또 정묘호란 때에는 양응정의 손자 양만용이 의병을 일으켰다. 박산마을에는 어등산 전투지이기도 했다. 어등산(293m)은 광주와 장성 그리고 나주와 함평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지리적 요충지로서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이 곳의 김태원, 김준, 조경환, 양동환, 김원범 등 의병장을 포함한 여러 의병이 어등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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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어등산 등산로)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