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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형 묘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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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욱 순국기념비
조현욱(1854 - 1922)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무계동(武溪洞)의 유지 신태휴(申泰烋)·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주민 50여명을 규합하고, 다시 현서면사무소에 있던 구장 및 유지들을 종용하여 그들의 호응을 얻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시장으로 몰려갔다. 도중에 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화목주재소에서 출동한 3명의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에 병탄된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비분하여 투신 순국하였다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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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욱 묘
조현욱(1854 - 1922)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무계동(武溪洞)의 유지 신태휴(申泰烋)·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주민 50여명을 규합하고, 다시 현서면사무소에 있던 구장 및 유지들을 종용하여 그들의 호응을 얻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시장으로 몰려갔다. 도중에 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화목주재소에서 출동한 3명의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에 병탄된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비분하여 투신 순국하였다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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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덕 순국기념비
장윤덕(1872 - 1907)의 본관은 안동이며,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경북 예천군(醴泉郡)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워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후 1907년 4월에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를 비롯한 매국적신들을 살해코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신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서 재차 거의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장윤덕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대장 휘하에 합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奉化), 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보조원(日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그 해 8월 27일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그 후 9월 3일 문경읍을 습격,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인의 가옥을 소각시켰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영곡경시(永谷警視)와 삼원소위(三原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적 3명과 한인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이어 16일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전중(田中)대위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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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묘
이경희(1880 -1949)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5월 10일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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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찬회 집
구찬회(1890 - 1910)는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투사로부터 국내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과 기타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받아 국내 유지들에게 살포하고 그 자신이 자필로 이를 복사하여 배포하다가 1909년 12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로부터 배후인물을 대라는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악형을 받다가 1910년 5월 13일 서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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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송덕비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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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의윤 묘
권의윤(1868 - 1942)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24일 경상도지방 독립만세운동의 연락 책임자이던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당시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교사인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이만집·김태련·김영서·이상백·백남채·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만나 서문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의 동원을 분담하였는데, 그는 계성중학교 학생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전해들은 대구고보(大邱高普)에서도 허 범(許範)·백기만(白基萬)등의 학생이 주동하여 계성중학교 학생들과 합동하기로 약속하였으며, 대구에서의 거사계획을 듣고 대구로 내려온 김무생(金武生)·박제원(朴齊元)이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서의 여자들의 활약상을 전하고, 대구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학생들도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성경학교(聖經學校)와도 연락을 취하여 연합시위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3월 6일에는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김태련이 자기 집에서 이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기(旗)와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매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3월 3일에는 홍주일(洪宙一)이,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제에게 예비 검속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이어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그는 오후 3시경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6정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대열 안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여 현장에서 수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그는 포위망을 뚫고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각지를 전전하며 피신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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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못 상화동산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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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묘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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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해 묘
정운해(1893 - 1945)는 1910년 망국 후 해외로 망명하여 연해주(沿海州)와 만주(滿洲) 일대에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가,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결성에 참가하였다. 길림군정사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후신으로 무장투쟁노선을 지향했는데, 이때 그는 선전 및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大邱支會) 결성을 주도하면서, 대구와 경북 일대에서 노동운동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전형위원·기초위원·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동년 11월 서울에서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사상단체 북풍회(北風會)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노농부를 맡았다. 동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朝鮮共産黨事件)으로 인한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탈출하여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에 가입했다가 조공 일본부가 파괴되자, 다시 간도로 망명했으나 1927년 5월 간도(間島)에서 체포되어 1928년 5월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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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윤 묘
손양윤(1878 - 1939)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항상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하였다. 1916년 채기중(蔡基中)·박상진(朴尙鎭)·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8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1924년 8년형으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으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출옥 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徐)모라는 자의 밀고로 체포됨에 따라,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신양춘(申陽春)·윤창선(尹昌善) 등의 동지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도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三通旅舘)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8년 7월 30일 체포되었으며, 신현규·신양춘의 두 동지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년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하고 변사(變死)하였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동년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1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말에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 일만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