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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묘
이혜경(1889-1968)은 함경남도 원산의 진성(進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적극 동참하였다. 또한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혈성단(血誠團)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9월 김마리아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고 항일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조직을 전환하였는데, 이혜경은 이때 부회장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계 역할을 대행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특히 회비와 수예품 판매 등을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 6,000원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이혜경은 1920년 중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혜경은 1926년 대구성경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김성국과 결혼하여 광복 이후 대구에 거주하였다. 이혜경은 1968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이혜경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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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환 묘
송두환(1892-196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5월 사재 1,300원을 들여 독립운동가의 연락을 위한 비밀장소로 대구시내에 가옥을 매입해 동료 최해규(崔海奎)를 거주시켜 연락사무를 맡겼다. 그리고 무기와 선전문서 등의 입수방편으로 신의주에도 가옥을 구입해 생질 정욱(挺郁)에게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하게 하였다. 1920년 고향 달성군에서 동지 수십명과 같이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 조직체를 구심점으로 하여 농민 2,300여 명을 규합해 복지활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이 잘 살아야 독립운동도 원활히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농민의 조직화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단일정부로 통합된 뒤, 군자금 모금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요원의 위촉을 받았다. 경상북도 일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중 경상남도 의령군 일본경찰 사살사건의 주모자 혐의를 받고 그 해 12월 하순경 남마산(南馬山)에서 붙잡혔다. 1921년 3월 가석방되었지만, 그 해 4월 초순에 다시 잡혀 신의주지방법원지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평양과 서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2년 8월 가석방되어 다시 군자금 모금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경상북도 제2사건 주모자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구형받았으나, 신의주사건과의 일사부재리원칙이 적용되어 무기소지 등 다른 죄목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11월에는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병로(金炳魯)를 선출하고, 중앙위원 전체 40명 중의 1명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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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천 묘
김명천(1916-1999)의 자는 인전(仁前)이다. 3살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부득이 만주 펑톈성(奉天省) 시펑현(西豊縣)으로 이주하였고, 철령육영학교(鐵嶺育英學校)와 하얼빈(哈爾濱)의 고중(高中,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북만주 지린성(吉林省) 동북항일군 독립단 무술대에서 종군하였다. 당시 일본군 점령 지역인 이란현(依蘭縣) 이도하자(二道河子) 탈환 작전에 참전하여 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가 백병전으로 일본군 주력부대를 격멸하여 항일 연합군 철수 진로를 개척하는 데 참여하였다. 한편 일제는 각지에서 봉기하는 중국인 의용군을 토벌하려고 중국 동북 각지에 관동군을 분산 배치하여 직접 만주국군을 지휘한 결과, 중국 항일의용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항일 투쟁의 기세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1932년 12월 만주의 주요 거점 지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됨에 따라, 소속된 한·중 연합군부대와 함께 소·만 국경지역의 미산(密山)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소·만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이동하여, 1933년 2월 러시아령 두으므스크에 이르러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무렵, 지린성장(吉林省長) 리두(李杜)의 자위군 및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마잔산(馬占山) 부대와도 조우하였다. 같은 해 5월 중국 서북 지역의 신장성(新疆省)에 도착하여 동북항일구국군은 신장변방군으로 재편되어 군사훈련과 후방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지방민의 반란 폭동 진압작전에도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1939년 5월 신장성의 중국중앙군관학교 제9분교에 입교하여, 1940년 10월 제3기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한편 1944년 11월 광복군 제2지대 공작조의 일원인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이 중국군 제34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산시성(山西省)·허베이성(河北省) 등지에서 초모 활동招募活動 및 지하 활동을 통해 적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 점령지구에서의 초모 활동을 통해 전성윤·최창모·윤치원·김두환·박승렬·최복련·김선옥 등의 탈출을 도왔다. 이때 시안(西安)으로 와서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에 편입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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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일 묘
이헌일(1917-1979)은 1943년 9월 광복군 제3지대장의 지령으로 이장식(李張植)·김군남(金君南) 등과 함께 화난[華南]·한난[漢南]·광둥[廣東]·안난[安南]·항저우[抗州]·상하이[上海] 등지에 밀파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5월 난징[南京]에 밀파되어 공작 중이던 이상일(李想一) 등이 체포되자 공작을 중단하고 귀환하였다. 8월에는 특수공작훈련대에 편입되어 훈련 수료 후 적 후방 지하공작원에 임명되었고, 쉬저우[徐州] 지구에 파견되어 일본군 내 한인 병사 탈출을 도모하였다. 이헌일은 1945년 2월 중국 중앙군 10전구 102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참모로서 적 후방 유격대 편성 등을 지휘하며 광복 때까지 활약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중국군 제10전구 사령장관부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대원 20명과 함께 일본군 무장해제 업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헌일은 1979년 4월 17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이헌일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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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헌 묘
박재헌(1900-1986)의 이명은 박재곤, 박영재이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권의윤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박재헌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8일 박재헌은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박재헌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재헌은 출소 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고, 1920년 미국의원단이 입국하였을 때는 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귀국하여 경상북도에서 군자금 모집, 납세 거부 운동, 일본 상점의 물품 판매 반대 삐라 살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채(公債)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로 이정호(李貞浩)를 중국에 도항시켰다. 이후 박재헌은 경상남도 밀양에 있던 집성학교(集成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밀양교회를 중심으로 농촌 사업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시도하다가 1925년 일제에 발각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26년에는 대구 미국선교회(美國宣敎會)의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41년 12월 18일 다시 투옥되었으나, 1942년 6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박재헌은 1986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박재헌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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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득 묘
정상득(1886-1969)은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천(永川) 일대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이에 참가하여 척후장으로서 활약하던 중 체포되었다. 출옥한 후 1909년에 의병장 민긍호(閔肯鎬)·김상태(金尙台) 등과 회합하여 복계곡(福溪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한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대구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3·1 동지회'를 조직하여 3·1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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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 묘
정명준(1900-1959)은 1925년 9월 29일 대구의 서동성(徐東星), 경남의 방한상(方漢相), 칠곡의 신재모(申宰模) 등 7명과 함께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인 진우연맹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폈다. 진우연맹은 회원이 1,100여 명이나 되는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를 지도하면서,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와 연계도 강구하였다. 1926년 4월 12~13일 신재모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연맹 내에 파괴단(破壞團)을 만들어 대구의 주요 관서와 일인(日人) 점포 파괴, 수뇌부 암살 등을 하기로 하였다. 폭탄은 상해(上海) 민중사(民衆社)의 무정부주의자 유림(柳林)을 통해 입수키로 하였으나 연맹원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가택 수색 결과 전모가 드러나 1926년 7월에 체포되었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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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모 묘
신재모(1885-195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폭력단·용진단(勇進團)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비밀결사인 파괴단을 조직하여 상해로부터 폭탄을 가져와서 대구내의 일본인 상업중심가를 파괴하고 일본인 수뇌들을 폭살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는 일본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노동친목계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진우동맹(眞友同盟)을 조직,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26년 진우동맹이 일본경찰에 탐지되면서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잡혀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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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상 묘
방한상(1900-1970)의 호는 만취이며, 일제강점기 대구청년회 간부, 진우연맹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5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해 대구에서 가업인 한약상(漢藥商)을 도우면서 대구청년회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서울로 올라가 머물렀다. 이후 북풍회(北風會)·화요회(火曜會) 등의 사회주의 계열과 접촉하면서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단체에 참여하였다. 무정부주의사상에 심취한 방한상은 사회주의 계열과의 공동 투쟁에 회의를 느꼈다. 무정부주의 동지들의 독자적 이념 연마와 결속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9월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정명준(鄭命俊)·서학이(徐學伊)·마명(馬鳴)·정해룡(鄭海龍)·안달득(安達得)·서동성(徐東星)·하종진(河鐘璡)·김동석(金東碩) 등과 무정부주의사상 연구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일본의 여러 단체와 제휴해 공동 노선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대판(大阪) 등지에서 조선인·일본인 동지들과 교유하면서 긴밀한 유대를 맺었다. 자아인사(自我人社)의 구리하라[栗原一男], 흑화사(黑化社)의 랴쿠모토[掠本運雄], 흑우회(黑友會)의 김정근(金正根) 및 흑선풍(黑旋風), 해방전선(解放戰線), 자유노동(自由勞動), 관동(關東)노동조합연합회 등과 연합해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본부를 동경에 두었다. 한편, 시곡(市谷) 형무소로 박렬(朴烈)과 가네코(金子文子)를 면회 위문하고 돌아와 의연금을 모아 송금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구리하라·후세(布施辰治) 등이 대구로 오자 진우연맹과 흑색청년연맹의 협력을 다짐하는 등 무정부주의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진우연맹 회원들은 여러 차례 회합 끝에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흑색청년연맹과 제휴할 것, 그리고 부호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대구 일대에서 파괴·암살을 실행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우선 경상북도 도청 및 경찰서·재판소·정거장을 한꺼번에 파괴하고, 도지사 이하 중요관헌을 암살한 이후에 일본인들의 시가지인 원정(元町) 일대를 파괴하고 나아가 전 조선에 무정부주의사상을 선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김관선(金官善)과 연락해 폭탄의 밀반입을 추진하던 중 안달득이 절도 혐의로 잡힘에 따라 거사 계획이 드러나, 8월에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오랜 예심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1927년 7월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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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한 묘
김충한(1883-196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출신으로, 김천 황금동 교회 조사였다.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 교회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김원휘,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 학교 학생 김수길, 황금동 교회의 원로인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김충한은 태극기와 경고문을 제작하여 김천 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에 살포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모의 도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황금동 교회에 모인 주동 인물 네 명을 비롯하여 모두 일곱 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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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촌 묘
백영촌(1882-1964)의 이명은 백남신, 백영근이며, 대한제국기 정용기의 산남창의진에서 우포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己)·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하였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에 앞서 의병장 정용기가 관군에 붙잡히자 청하와 경주 등지를 공격하는 등 소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뒤 정용기가 출옥하여 1907년 4월 다시 산남의진을 형성할 때 소포장을 맡아 영덕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그 해 9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한 뒤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어 영덕에 두 차례 잠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여 1908년 7월 청하군 죽남면의 김재정(金載貞)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1년 7월에 일제에 의해 소위 강도 살인 및 구타 등의 죄로 대구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8년 9월 만기출옥한 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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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묘
박영진(1921-1950)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 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 김천성(金天成)‧ 김용주(金容珠)‧이월봉(李月峰)‧이삼녀(李三女) 등과 함께 중국 제34 집단군 타이항산주1〔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주2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일본군 점령 지역에 잠입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초모(招募)주3하는 것이었다. 타이항산 입구에서 박영진은 김동수 등과 함께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사진관을 운영하는 문응국(文應國)을 비롯하여 6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초모하였다. 초모된 인원은 대부분 본부가 있는 시안으로 후송되었다. 1940년 말에 이르면 1백여 명에 가까운 대원을 확보한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지공작대가 적의 후방에서 초모 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였고, 전지공작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박영진은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통합하여 개편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중일전쟁주4이 가속화되고 일본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한국광복군 공작대가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것은 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김원봉(金元鳳)은 최성오(崔省吾)와 주세민(周世敏)을 파견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충칭〔重慶〕의 영국대사관 부관 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지청천) 총사령관과 주인도(駐印度) 영국군 동남아 전구(戰區)주5 총사령부 대표 매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 · 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 인도와 미얀마 전구)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따라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박영진은 공작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인면공작대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으로는 최봉진‧ 김상준‧나동규‧송철‧김성호‧이영수 등과 박영진이었다. 박영진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인도로 파견되었다. 1943년 12월 전방 지구인 인도 임팔주6(Imphal)에 주둔 중인 영국군 제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박영진은 제201부대 본부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여 1945년 연합군이 미얀마 지구의 일본군에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박영진은 한지성‧김성호와 함께 미얀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를 향해 남진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미얀마 수도 양곤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5월 초 양곤을 탈환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해 7월 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으며, 9월 10일 대장 한지성 및 동료들과 함께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