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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수 묘
서달수(1920 - 1992)는 경북 월성(月城) 사람이다. 1938년 3월에 도일하여 일본대학(日本大學) 정치과에 재학중, 일인의 한국학생차별과 재일교포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민족적 분개심을 갖고 항일의식을 길렀다고 한다. 그후 그는 동교생 김덕중(金德中)·김홍구(金鴻九) 등과 함께 항일결사 비밀동지회를 조직하였는데 동회는 동경재류 유학생의 단결을 통한 독립사상 고양에 목적을 둔 비밀결사로서 표면상으로는 학술·문예·체육부 등을 두어 학술연구 단체로 위장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동지포섭에 힘을 쏟는 한편 토론회 및 발표회를 개최하면서 항일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동회의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1년 1월에 붙잡혀 곧 국내로 이송되었다. 그후 그는 1941년 11월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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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훈 묘
김교훈(1880 - 1934)은 대전(大田) 사람이다.구한말에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1919년 국민대회(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지원 등의 활동을 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김교훈은 1907년 군대해산과 더불어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에 투신하여 강원·충남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4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김교훈은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가입하여 권유부장(勸誘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앙총부는 경남 함안(咸安), 진주(晉州) 등지에 신상태(申相泰), 변상태(卞相泰) 등 2명을 파견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김교훈은 1919년 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 등과 함께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2일 각계 대표 20여 명이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의정하였다. 그때 그는 유림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 23일 13도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이로써 「한성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만주 소항령(蘇項嶺)에서 노백린(盧伯麟)을 교관으로 30,000명의 병력을 훈련시키기 위해 자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벌이기로 하고 귀국하였다.그는 우선 각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솔선하여 협조하지 않는 등, 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자 계획을 바꿔 중국지폐를 위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1919년 6월 붙잡혀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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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묘
이승주(1922 - 1990)는 평북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인 토교대(土橋隊)에 소속되어 임정요인들의 신변보호, 경호 활동 등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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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 묘
신길우(1924-2003)는 경북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신길우는 1943년 10월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남경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중국 충칭[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1944년 4월 탈출에 성공한 뒤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4월 충칭에 도착하여 광복군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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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용 묘
김석용(1924-1990)은 1939년 3월에 도일(渡日)하여 1941년 6월 경도(京都)의 도촌토공(島村土工)으로 근무중 궁진(宮津)중학을 졸업하고 토공으로 취직한 전경원(全京元)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김말도(金末度)·이상문(李相文)등 수명의 동지를 확보하고, 동년 9월부터 여사군(與謝郡)소재 미륵신사 경내에서 누차 회합하고 민족정신고취 및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족차별의 철폐, 징병제도의 반대, 항공병을 지원해서 일본군 기지 폭격, 일본 경찰에 들어가 대대적인 독립운동전개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44년 6월 일경의 토공숙사 일제 수색으로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활동이 탐지되어 동지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으며 장기간의 예심 끝에 1945년 9월에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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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휘 묘
김원휘(1884-1950)는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휘(金原輝)[1884~1949]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비안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김원휘는 안평면 괴산동 괴산 교회 조사(助事)로서, 평양 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마침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만세 시위를 목격하였다. 그는 시위로 인해 학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여기서 평소 김천 출신으로 알고 지내던 황금동 교회 김충한 조사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김천과 의성에서 각각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고 합의하였다. 김원휘는 3월 6일 쌍계에 도착하여 쌍계 교회 박영달 장로를 만나고 다음 날에는 안평면 괴산 교회 담임 목사인 박영화 목사를 만나 시위를 모의하여 실행에 옮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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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재 묘
안윤재(1877-1944)는 일제강점기 양기탁 등 16인 보안법 위반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하면서 1910년 9월과 10월 김도희(金道熙)를 내려보내어 그 준비를 위임하자 이에 찬동하여, 김구(金九)·이승길(李承吉) 등과 황해도 회원의 집단이주계획을 수립하고 송화군의 이주민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권태선(權泰善)·감익룡(甘翊龍)·이종록(李鍾祿)·전용서(全溶瑞)·강유(康有爲) 등과 이주계획과 군자금모집을 추진하였다. 일제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을 기화로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애국지사들을 구속한 이른바 ‘양기탁 등 16인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1911년 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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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묘
최고(1924-1988)의 아호는 추운이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서울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급생 이현상·장의찬·명의택·주낙원 등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차단하기로 결의하였다. 1941년 항일학생결사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였다. 기본 강령으로는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 비밀, 책임 완수 등을 정하였으며, 이때 최고는 남상갑과 함께 자금책의 일을 맡았다. 1943년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김창흠이 귀향 도중 일제를 욕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가택수색을 당하는 과정에서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었다. 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격에 의하여 당원 전원이 베이징, 선양, 신민, 청더 등지에서 피체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최고는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 수감 생활 중 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해방 이후 최고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영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1964년 대구로 내려와 대구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대구 시내에 살고 있었으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최광렬과 친하게 지내며 때로는 최광렬의 집 단칸방에서 묵기도 하였다. 최고가 국우동 끝자락 외딴집에 살고 있을 때 칠곡중학교에서는 시인 전상렬이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최고는 1988년 8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최고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고 1984년 대구시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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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홍 묘
조기홍(1883-1945)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잠적하였다. 12월에 대구 출신의 최익무(崔益武)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姜泰東)·이정래(李丁來)로부터 대한청년단 명의의 「적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와 「남녀 학생에게(포고 제1호)」,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명의의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포고 제2호)」, 「독립축하가」라는 항일 문건을 전달받았다. 이후 조기홍은 최익무·서상하(徐相夏)·이종선(李鍾善)과 함께 이를 등사하여 대구 시내 각 학교와 상점 등에 뿌려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한민보(大韓民報)』 수백 매와 격문 등을 평안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1922년 출옥한 직후에도 대구에 거주하는 양한위(梁漢緯)와 함께 일제 관리 습격과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였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 남쪽 비파산(琵琶山)에 숨겨두고 기회를 노리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계획이 좌절되었다. 조기홍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이후에도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1945년 8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조기홍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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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도 묘
김삼도(1900-1967)는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와 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은 당시 계성학교 6학년이었던 김삼도를 비롯한 심문태(沈文泰)·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이영식(李永植)·이성용(李聖容)·박재곤(朴在坤) 등의 학생을 소집하여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김삼도는 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으며, 다른 학생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8일 김삼도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은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삼도도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삼도는 1967년 사망하였다. 정부는 김삼도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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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술 묘
김헌술(1924-1988)은 . 일본 경도 중학교 재학중인 1941년 5월에 교유 김영규(金永圭)와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개하고, 민족의 자유·행복을 찾기 위해서 독립의 실현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부터 9월까지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는데 한편으로는 일본과 일전을 겨룰 것에 대비하여 군사교육에도 정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도에 반대하여, 만약 징병을 당할 경우에는 조선인 병사들로 하여금 연합군에 투항케 함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주어 패전을 촉진케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앞서 그는 동지포섭에 힘을 쏟아 학우 또는 동향의 지기들에게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2년 10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6월에 경도(京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불경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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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국 묘
김성국(1901-1932)은 남만주 일대의 통일된 독립운동 기구인 통의부(統義府)의 활동에 동참해 1924, 5년경에는 중대장 문학빈(文學彬)이 이끄는 통의부 제6중대의 3개 소대 가운데 제3소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11명의 무장대원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주로 관전현(寬甸縣) 서쪽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여름부터는 손성진(孫聖眞)·마창욱(馬昌郁)·마창수(馬昌洙)·김성호(金成浩) 등의 동지들과 함께 임강현(臨江縣), 안도현(安圖縣)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경찰에게 붙잡힌 뒤 일제의 삼장경찰서(三長警察署)에 인도되고 말았다. 청진지방법원으로 압송된 그는 1927년 2월 4일 증거불충분으로 출옥하였다. 그 후 만주사변 당시 길림의용군(吉林義勇軍)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중국 혼성군에 붙잡혀 길림(吉林) 부근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