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126건
-
정학이 동상
정학이(1913~1934)는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28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일본 대판(大阪)에서 대판지구 교포의 인권보호와 친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여 지하실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항일조국독립을 위한 벽보를 작성하고 인쇄물을 대판 일대에 배포하였다. 1933년 9월 2일 대판(大阪)에서 피검되어 동년 1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판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4년 11월 3일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최종응 집(월연댁)
최종응(1871 - 1944)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북 선정사(宣政使)로 임명되어 동지 고정일(高政一)·윤 철(尹喆)·이태훈(李泰勳)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조달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동년 9월 경상·충청·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조석환(曺奭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그들에게 8백원을 받아 임정파견원 고일치(高一致)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에 사는 윤병돈(尹炳敦) 등 경북에 거주하는 부호 수명에게 2천원 내지 5천원을 요구하는 군자금납입명령서(軍資金納入命令書)를 송부하고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이태훈(李泰勳)에게 전달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미대 여봉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4월 26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이다.인천채씨(仁川蔡氏)들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당시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동족부락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었다. 미대동에 살던 채학기(蔡鶴基)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읽고 민족독립에 절실히 공감했다. 그 후 채학기는 독립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을 호소했다. 이에 채봉식(蔡奉植)·채희각(蔡熙覺)·채갑원(蔡甲元) 등이 채학기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919년 4월 26일 오후 10시 무렵 미대동에 있는 여봉산(礪峯山)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미대동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1919년 4월 28일 이들 채학기·채봉식·채희각·채갑원은 친족인 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채재갑(蔡再甲) 등과 함께 다시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그들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 소속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대구에 위치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이들은 모두 10대에서 20대의 청년층이었고,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
3.1독립만세운동 유적지 여봉산 표지석
여봉산은 미대마을 8인 청년(애국지사)들이 1919년 4월 26일 부터 28일까지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곳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표지석을 세웠다. 1919년 4월 26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이다. 인천채씨(仁川蔡氏)들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당시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동족부락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었다. 미대동에 살던 채학기(蔡鶴基)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읽고 민족독립에 절실히 공감했다. 그 후 채학기는 독립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을 호소했다. 이에 채봉식(蔡奉植)·채희각(蔡熙覺)·채갑원(蔡甲元) 등이 채학기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919년 4월 26일 오후 10시 무렵 미대동에 있는 여봉산(礪峯山)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미대동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1919년 4월 28일 이들 채학기·채봉식·채희각·채갑원은 친족인 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채재갑(蔡再甲) 등과 함께 다시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그들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 소속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대구에 위치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이들은 모두 10대에서 20대의 청년층이었고,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
임용상 묘
임용상(1977 - 1958)은 대한제국기 동해창의대장, 동해지구 유격장, 좌포장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 경상북도 청송 출신. 임효수(林孝洙)의 아들이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에 대항하여 거의를 결심하고 김재서(金在瑞)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東海倡義大將)에 추대되어 청하·영덕 등지에서 일본군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의병진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 지방별로 계획을 추진하는 담당자를 선정할 때, 서종락(徐鍾洛) 등과 청송지역을 맡아 산남의진 성립에 기여하였다.그 해 4월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정용기가 투옥되고 전력이 약화되어 7월경 해산되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의진이 창군되자 동해지구 유격장에 임명되어 청송·영천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 해 7월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으로 진출할 때 본진에 합류, 좌포장이 되었다. 9월 영일군 죽장면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200여 신병을 이끌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훈련시켰으며, 1908년 봄에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경주·언양·양산·밀양·영산·창녕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6월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 만에 석방되어 1910년 4월에 옛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여 보현산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 대장이 되어 청송·의성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다시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송서룡 묘
애국지사 송서룡(1916 - 1979) 공은 항일 전선의 첨단을 누비며 싸운 광복군의 일원이다. 서산 송씨로 상조는 문익이요 중조는 이석으로 평안도 지방의 성족이다. 부는 태환이요 모든 이숙영으로 1916년 3월 8일 평북 운산군 북진면 진동에서 출생 15세에 북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학교에 재학중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받고 1932년 하기 방학으로 귀국하자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성토한 끝에 잡혀 20여일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더욱 배일의 사상은 굳어졌다.1935년 4월에는 완농광업소에 취직하여 민족 운동의 서클을 조직했다가 다시 잡혀 많은 고초를 당한 후 대륙으로 건너가서 구국의 항쟁의 길로 들어갔다.소간찬 동지와 죽음의 맹세를 손을잡고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하남성 이북현 하읍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42년 봄 광복군 제6변사 분처에 입단 소정의 훈련과정을 수료한 뒤 추양현으로 파견되어 지하 공작원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귀덕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특파단 제16대대 3중대 소속으로 임천과 주가구 등지에서 항쟁중에 광복을 맞았다.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박태현 묘
박태현(1899 - 1974)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당시 대구(大邱)에 있는 계성학교(啓聖學校) 5년생으로 대구 서문(西門)밖 장터에서 이만집(二萬集)·김태련(金兌鍊) 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는 높이 들고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8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방봉순 묘
방봉순(1918 - 1998) 지사는 1918년 9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 246번지에서 방경흡을 부로 곽익순을 모로 하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안악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운전기술자로 활동 중 1945년 5월 한국 광복군 지하 공작원 박윤기와 접선 광복군 제3지대 소재지인 부양으로 이동 중 귀덕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되어 헌병대 영창에서 악독한 고문을 받았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석방되어 1945년 10월 19일 부양 본대에 도착하였다.
-
배학보 묘
배학보(1920 - 1992)는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1년 2월 15일에 동교생 권쾌복(權快福)·문홍의(文洪義)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부당수겸 연구부·운동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이동하 묘
이동하(1875 - 1959)는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일찍이 서울 계산학교(桂山學校) 교원,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 교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창립하여 수백명의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1년에는 박은식(朴殷植)·윤세용(尹世茸)·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외 40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후에는 윤세복과 함께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이어 흥경현(興京縣)에 흥경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흥경·환인 등의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일하였다. 1919년 봉천(奉天)에서 체포된 이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최태석 묘
최태석(1920 - 1995)은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1년 2월 15일에 동교생 권쾌복(權快福)·유흥수(柳興洙)·문홍의(文洪義)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동교의 항일결사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가 회원의 졸업으로 해체될 형편에 있었으므로, 이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확대·개편한 단체로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여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교내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넓혀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경기 등 각 부서를 두었다. 이때 그는 육상경기부 책임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이때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정동석 묘
정동석(1885 - 1968)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9년 9월 중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경북 대구(大邱)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고 있는 송두환(宋斗煥)으로부터 권총 2정, 실탄 10여발을 보관 의뢰받아 집에다 은닉하였다.1920년 1월 중 대구(大邱) 신암동(新岩洞) 구장(區長)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다시 송두환으로부터 권총 3정, 실탄 300여발을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동삼성(東三省)내의 독립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활동하는 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노기용(盧企容) 등의 활동이 발각됨에 따라, 1923년 11월 27일 일경에 붙잡혔다.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총포화약류취체령(銃砲火藥類取締令) 시행규칙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2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