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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 참여의 기폭제가 됐던 대구 남일동 7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애국계몽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2월 21일 북후정에서 열린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는데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눈부셨다. 여학생은 물론 가정의 부인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성 못지않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남일동 7부인회는 비녀와 반지를 뽑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석을 국채보상금으로 헌납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정신은 뒷날 3. 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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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모 집
신재모(1885 - 195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24년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폭력단·용진단(勇進團)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비밀결사인 파괴단을 조직하여 상해로부터 폭탄을 가져와서 대구내의 일본인 상업중심가를 파괴하고 일본인 수뇌들을 폭살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는 일본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노동친목계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진우동맹(眞友同盟)을 조직,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진우동맹이 일본경찰에 탐지되면서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잡혀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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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형무소 이원록 조형물
대구형무소의 개소 당시 수감 인원은 형사 피고인 85명에 수형자 89명을 합쳐 모두 174명이었다. 1909년에는 607명, 1910년에는 759명으로 급증하였는데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이후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반증이었다. 3·1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5,0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는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항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1,200여 명에서 1,400여 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대구형무소에는 독립투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는데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수인 번호 ‘264’도 대구형무소 복역 시절의 번호이다. 시인 김영랑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장진홍과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 등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39년 1월 1일 기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의 본적을 보면 전체 수형자 1,147명의 본적은 한국·중국·일본에 걸쳐 있고, 국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도 경상북도가 가장 많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보다 27명이 많을 만큼 대구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투옥된 형무소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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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사 기념비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대구에서 대한 자강회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자생 계몽 운동 단체로서 흥학 설교(興學設校)와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교육 진흥을 바탕으로 한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하였다. 대구 광문사에는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층 등 지역의 공망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 광문사의 사장에는 김광제(金光濟), 부사장에는 서상돈(徐相墩)이 맡았다. 1906년 4월에 개최한 총회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관한 방침을 의결하였다. 이를 위해 대구 광문사 내에 문회를 설치하고, 그 회원으로 400~500명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3월 새로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와 연대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신태휴는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황제의 칙유(勅諭)와 천 원의 하사금을 매개로 하여 달성군수 김한정과 함께 관덕정(觀德亭)을 수리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 설립에 나섰다. 여기에 대구 광문사 사원 다수가 발기인이 되어 기금 조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또한 신태휴는 탁지부의 훈령대로 측량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찰부 소재 낙육재와 연계재 소속 전토를 합해 달명의숙(達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에 이현주(李玄澍), 부교장 겸 강사에 김광제 등이 맡게 하였다. 그밖에 낙육재에 공립 대구 중학교, 대구 사립 양성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관내 41개 군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설치되어, 학생 수가 무려 4,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대구군의 학생 수는 470여 명에 달했다. 1907년 2월에 대구 광문사 문회는 학교 설립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구 광문회로 바꾸고,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대한 황제의 조칙을 낭독 선포한 후 회원들이 각 군을 순행하여, 학교 설립 방침과 사회적 취지를 연설하고,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강구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 문회는 일본동아 동문회(東亞同文會),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 국제적으로 연계하여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육 진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대한 자강회에서 정부에 의무 교육 실시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이어서 강제적 의무, 곧 의무 교육제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다시 정부에 건의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는 출판 활동에도 역점을 두었다. 곧 동서양 서적의 번역 출판과 충효열행(忠孝烈行)에 관한 사례집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 군 관리의 잘잘못과 인민의 선악을 조사하여 매월 3회씩 잡지로 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구 광문사는 출판 사업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해 동사 내에 찬술원을 두었다. 1906년 5월 대구 지방에는 계몽 운동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던 자치 조직으로서 인민 대의소(人民代議所)가 조직되었다. 인민 대의소는 민지 개발(民智開發), 민권 부식(民權扶植), 설교 흥학(設敎興學), 식산흥업 등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면서,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인민의 회의체였고, 자치 및 자강을 도모하여 국권을 확립하고자 한 단체였다.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 문회는 문회를 대동 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단연 보상 운동(斷煙報償運動)이 제기되어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자생적 계몽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 대구 광문사는 교육 운동, 문화 운동, 경제적 실력 운동 등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계몽 운동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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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대구 지역의 부자인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개인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다. 우현서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신문화(新文化), 신교육(新敎育) 보급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한말 대구 애국 계몽 운동의 산실이자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는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義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교육 기관으로 세워진 우현서루 도서관에는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과 청나라에서 수입한 신학문 관련 서책 수백 종 등 약 10,000권 정도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다. 1904년 이동진이 창설하였으며, 매년 20~30명의 젊은 학생을 선발하여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시켜 약 150여 명의 애국지사를 길러 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1859~1925],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 사건’의 주인공 김지섭(金祉燮)[1884~1928], 이동진의 손자이자 이일우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이상백(李相佰)[1904~1966]·이상화 등을 비롯하여 권일제, 여운향, 김성수 등이 우현서루 출신이다. 또한 1906년 8월경 이일우, 최대림(崔大林), 윤영섭(尹瑛燮), 김선구(金善久), 윤필오(尹弼五), 이종면(李宗勉), 이쾌영(李快榮), 김봉업(金鳳業)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의 사무실이 우현서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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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단연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는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 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