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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집 3.8만세운동기념지 동판
본 동판은 이만집 목사에 의해 주도된 3.8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이만집(1876 - 1944)은 남성동(南城洞)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유지인사들인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가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경, 앞서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태련은 남산동 자택에서 등사 기계를 사용하여 선언서 200여 부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 4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거사 당일인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고 등 보통학교·신명여학교·대구성경학교 등 대구지역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때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주도자를 비롯한 7, 800여 명의 시위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 독립기'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일경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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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구국기념비
이상룡(1858.11.24 - 1932.05.12)은 호 석주(石洲). 일명 상희(象羲)·계원(啓元). 경북 안동(安東) 출생이다.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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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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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순국기념비
허위(1855 - 1908)는 대한제국 시기 13도의병연합부대 군사장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41세 되던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1896년 2월 10일(음력)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이기찬을 대장으로 금산(金山)·성주를 거점으로 대구부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대구의 관군이 급히 출동하고 이어 경군(京軍)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성주가 무너지고 이은찬 등 일부 장령이 사로잡혔다. 그 뒤 의병진에서는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재반격을 준비 중이었으나, 이 때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명령을 받은 허위는 그만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1899년 2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 원구단 참봉(圜丘壇參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 곧 성균관박사, 1904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국정 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 판서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勅任官) 2등으로 서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양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柳麟錫) 등 여러 지사들과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새로이 보국을 결의하고 9월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가을에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하여 13도의병연합부대(十三道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이때 이인영(李麟榮)이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이 되고 그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연합부대가 대오를 정비, 서울로 진격할 때, 정병 300명의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속부대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각처로부터 밀려오던 의병부대를 개별적으로 타격을 가하였다. 이 때 그도 갑자기 몰려온 일본군과 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후원군이 없어서 패하고 말았다. 당시 총대장인 이인영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중책을 맡게 되자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새로운 임진강의병연합부대(臨津江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의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한 이곳 일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에 소요되는 모든 군수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의병연합부대의 전법은 유격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적성 방면의 의병 5,000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무기를 제조하였다. 새로운 항일전의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중,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이라는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51세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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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학생운동지,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 추모비
본 페이지(시퀀스)는 대구학생운동지 안내판과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 추모비, 두 사적을 포함하고 있다. 두 사적 모두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를 전후하여 대구사범학교생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전개한 항일투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1939년 대구사범 학교생들은 교내에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의 3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1941년에는 문예부의 비밀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가담자 35명이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박제민 등 5명은 순국하였고, 광복이 되어 출옥한 사람 중에서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2명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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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3.1운동기념탑
계성3.1운동기념탑은 1919년 3월 8일 김영서 교감의 지휘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전원이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교감 김영서와 교사 최경학, 권희원, 최상원등은 학생 동원을, 백남채는 거사 계획과 준비를 담당 거사일을 3월 8일로 결정하여 신명학교와 대구고보등에도 통보하였다. 만성교회(현 제일교회) 조사 김태련은 계성학교의 등사기를 자기집으로 가져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아담스관 지하실에서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 날 본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집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행렬은 경정통(현 종로)를 지나 동성로까지 행진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가혹한 탄압으로 무차별 검거 해산당했고 3월 10일 오후 4시 덕산정 시장(현 염매시장)에서 재 궐기하였으나 이 또한 강제해산 당하였다. 그 후 본교는 휴교 조치되었고 영남지방에서 체포되어 실형 선고를 받은 76명중 본교와 관련된 인사는 44명이나 되었다.이러한 뜻을 기리고 계성인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본 탑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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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관 지하실
아담스관은 일제강점기에 선교사 아담스가 건립한 근대 조적식 학교 건물로, 대구3.1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구 3.1운동의 전날인 1919년 3월 7일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 백남채 등은 학생 김삼도, 이승욱, 허성도, 김수길, 김재범, 이이석 등으로 하여금 본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도록 하였다. 이날 등사된 독립선언문을 갖고 다음날인 3월 8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본교 교사와 전교생 46명은 대구지역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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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3.1독립운동 발원지 표지석
대구 3.1독립운동 발원지 표지석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그날 오후 2시, 큰장 입구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이만집과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구의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본 표지석 근처에서 위의 두 인물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위 사건과 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2010년 3월 1일에 대구광역시에서 본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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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3.1만세운동발원지 조형물
대구3.1만세운동발원지 조형물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그날 오후 2시,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이만집과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구의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위 사건과 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광역시에서 본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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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3.1운동기념탑
신명3.1운동기념탑은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신명학교 교사 및 학생들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거사 전날, 학생들은 학교에서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만들고 고향 부모님께 유서를 쓰며 비장한 각오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8일, 신명학교의 교사 이재인, 졸업생 임봉선, 이선애 등과 50여명의 전교생이 한마음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추애경, 최정술을 비롯한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대구 만세운동의 시발점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들은 동산교 근처에서, 그리고 김학진을 비롯한 20여 명의 기숙사생들은 약전 골목에서 시민들과 합류함으로써 대구의 만세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헌병과 육군병력을 동원하여 총칼로써 우리 학생들과 시위 군중들을 위협했다. 이때 붙잡힌 여학생들은 두 주간 구류에 처해졌으며, 이선애는 6개월, 이재인, 임봉선은 1년 등 실형을 선고받고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치렀다. 그 밖에 본교생들을 격려했던 김무생은 2년, 박재원은 1년 6개월, 그리고 신명학교 재직 당시에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심어 주었던 이만집은 3년, 김영서는 2년, 권희윤은 1년 6월, 신태근은 6개월의 징역 선고를 받았다. 신명의 3.1만세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활동을 통해서 꾸준히 계승,발전되었으며,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위와 같은 교사 및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널리 기념하고자 신명학교 개교 60주년을 기념하여 1972년 10월 재학생 일동이 본 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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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계단
3.1운동 계단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대구에서 3월 8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계단을 오르며 신명학교, 계성학교, 남성정 예배당 사진 등 대구3.1운동과 관련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계단은 3.1만세운동길에 있는데, 3·1 만세운동길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다녔던 골목길이다. 대구 시내 곳곳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대구 3·1 만세운동길은 1919년 3월 8일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골목길을 통해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서문시장 방면으로 나왔다고 해서 만세운동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단의 개수가 90개라고 하여 90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에 있으며, 시멘트 계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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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3.1독립운동기념비
대구3.1운동기념비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대구에서 3월 8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월 8일에는 큰장(서문시장), 10일과 30일에는 덕산동 동문시장, 4월 15일에는 대명동, 26일과 28일에는 미대동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대구 3.8 독립만세시위는 장날을 기하여 계성학교(啓聖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 연도의 주민·기독교인·천도교인 등이 가세하였고, 군중 수는 1,000여 명이었다. 만세시위 대열이 경찰서를 지나 달성 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5, 6대로 무장된 일본 헌병 및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저지되었다. 그리고 이 때 157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의 항일 저항 의식은 더 높아져 의거를 다시 하기 위하여 협의가 계속되었는데,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3월 10일부터 휴교령을 내려는 등 삼엄한 경계를 하였고, 학생들은 지하에서 만세운동을 지속하며 다른 지방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 6회의 시위와 혜성단에 3천 명 이상이 참가했고, 그 중 254명이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108명이 옥고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