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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독립운동기념비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학생독립운동기념비이다. 비는 한밭대학교의 전신인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본 사적은, 개교 91주년을 기념하여 한밭대학교 도서관 앞 광장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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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병 사적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본 비는 유성을 비롯한 대전 일대의 사민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유성의병을 기리는 사적이다. 유성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으로, 1895년 문석봉이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 국가의 원수에게 보복한다)과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의 정신에 입각하여 중신들의 찬동을 얻어 지방 사족들과 함께 일으켰다. 이들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공주의 와야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고 왕촌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의병장 문석봉이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위와 같은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한 고귀한 투쟁의 사적을 후세에 알려 기리고자 2004년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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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대전시 유성구 장동에 위치한 충렬사는 독립운동가 민영환, 최익현, 이준, 안중근, 윤봉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1997년부터 매년 5월 3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68년 건립된 충렬사는 당시 충남 대덕구 탄동면 장동리(현재 유성구 신성동~도룡동 일대)에 사는 여흥 민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충정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건립했다. 유성구에 위치한 우성이산이 여흥 민씨의 선산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대전지방보훈청이 충렬사를 현충시설로 등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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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수 구 묘
이권수(1894-1937)는 충청남도 대덕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집에서 이상수와 함께 조선의 독립을 동리 사람에게 알리자는 뜻으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 중심지인 높은 곳에 세워두고, 이튿날 사용할 소형 태극기 17개를 미리 만들었다. 3월 16일 오후 1시경, 이상수와 함께 소형 태극기를 가지고 유성 장터로 가서 독립만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이정석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약 20명의 시위군중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상수와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장터를 행진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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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순국기념비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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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두 추모비
권용두(1914-1992)는 1926년 6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1929년 4월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여 일본인 하급생인 멸시태도를 제재하려고 구타하여 징계를 받았다. 1931년 1월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에 가입하여 일제식민통치를 규탄하고, 농민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정신 고취 및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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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헌(신채호 생가 홍보관)
2015년 12월 8일 선생의 탄신일 135주년에 맞춰 개관한 신채호 생가 홍보관이다. 본래 생가 관리사로 건축되었던 단재헌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건물로 신채호 선생의 출생과 성장, 가족사와 그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콘텐츠로 제공한다. 홍보관 출구 쪽 벽면엔 조선혁명선언, 대한협회회보, 조선사 총론 등에 담긴 내용들이 전시돼 있다. 단재의 흔적이 깃든 옛 성균관 명륜당, 오산고 제1회 졸업식, 해조신문 발행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사진도 걸려있다. 영상관에선 단재의 역사관을 담은 10분 분량의 영상이 재생된다. 단재의 민족 독립 운동 역시 일대기 형식에 맞춰 각 주제마다 단재가 저술한 책이나 기고한 논설 등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중심사건을 미니어처 인물모형으로 묘사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 활약하던 단재가 투옥되는 순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모습,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모습, 여순감옥에서의 마지막 모습 등이 재현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생가는 진외가(할아버지의 처가)인 안동 권씨 문중이었다. 그러다가 1887년, 선생 나이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도리미 마을을 떠나 충북 청주로 옮겨간다. 생가터인 도리미 마을(대전시 중구 단재로 229번지)은 `88년 생가터임이 확인되고 `91년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2000년까지 토지매입 및 동상건립, 생가복원 등이 완료되었다. 홍보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생가 터에는 안채와 곳간채 등 복원한 초가 건물이 조성되어있으며 단재 선생의 시와 동상이 함께 건립되어 있다.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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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대전형무소(기억의 터)
대전형무소는 서울 아래 지역의 독립운동가, 정치적인 사상과 관련해 범죄를 저지른 사상범 등 사상범을 수용하는 곳이었으며 현재는 하나의 망루와 우물만 남아있다. 1930년에는 독방 80칸이 만들어졌고 1933년에는 사상범 감옥으로 지정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계속해서 만세운동이 이어져 수감자가 증가하게 되자 1939년 형무소로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안창호와 여운형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공사 당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 하나씩 망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하나의 망루만 남아 있다. 근처의 작은 공원에는 구 대전형무소에 대한 디지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라는 조형물을 조성하여 대전형무소의 역사,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 등에 대한 기록을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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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병 묘
박종병(1889-1971)은 1919년 김직원(金直源)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는데, 4월 18일 대전 장터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것을 기회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며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