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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로 광장 기념벽화
인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3·16·27일, 4월 1일 네 차례에 걸쳐 대전면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대전 인동시장은 대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시장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산물을 주로 거래한 장소이다. 인동시장에서는 1919년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쳤으며, 3월 16일에는 양사길·장운심·권학도 등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원동 일대까지 확산되었다. 3월 27일에는 김정철·김창규·김현태·조상련·윤명화·박종호·김성현·소홍규·김완봉·김완수 등이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직원·박종병 등이 주도하여 4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는 등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완봉(1899~1955), 김완수(1896~1972), 김정철(1900~1966), 김직원(1897~1933), 김창규(1885~1949), 박종병(1889~1971), 박종호(1890~1967), 소홍규(1882~1960), 윤명화(1879~미상), 조상련(1886~1970)은 1919년 3월 27일 대전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창규는 김정철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독립신문」 등 3백여 매를 전달받고, 김완수는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일 오후 3시, 이들은 4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미리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였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김완봉, 김정철, 박종호, 소홍규, 조상련은 징역 1년, 김완수는 징역 8월, 김직원과 박종병은 징역 10월, 김창규와 윤명화는 1년 6월을 선고받는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김정철, 김직원, 김창규, 박종병, 소홍규, 조상련에게, 1993년에 박종호에게, 1995년에 김완봉에게, 2009년에 윤명화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82년 김창규에게, 1983년 김정철에게, 1986년 소홍규와 조상련에게, 2020년 김완수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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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만세로
3.16 만세로는 1919년 대전지역 만세운동의 시발점이였던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확산하고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코자 지정한 명예도로명이다. 인동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인동 가마니 시장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양태석, 김노원, 장운심, 권학도 등의 청년들로, 그들은 가마니 더미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다가 주변 장꾼들에게도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삽시간에 장꾼들이 불어났고 주도자들은 행진대열을 짜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오후를 지나며 격렬해졌고, 시위대는 인동과 경찰서가 있는 원동을 지나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오후가 지나고, 용두동에 있는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 총격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15명이 사망, 9명이 체포되었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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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묘
김정철(1900-1966)은 충청남도 대전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김창규의 집을 방문하여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대전에서도 장날인 이달 27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등 300여 매를 김창규에게 미리 주었다. 3월 27일 오후 3시경, 김정철은 대전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을 나누어주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시가를 누비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7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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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집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建祠之命)으로 건립된 문충사(文忠祠)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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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송병순 사당(문충사)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순(1839-1912)은 충청북도 영동 사람으로,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송병순은 일제침략과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 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 은혜롭게 베풀어 준 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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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산 격전지비
이규홍(1877-1928)은 전라북도 익산 사람으로, 1905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4월 25일 친구 박이환, 문형모와 거의할 것을 맹약하고 이듬해 10월까지 거사준비를 하였다.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총기, 탄약, 화약, 의병 등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1월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1월 15일 고산 가금리에서 적과 첫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진안·장수·무주·용담 등지에서도 게릴라전을 벌여 왜적 44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적의 의병대 소탕전으로 인해 형세가 곤궁해져 1908년 4월에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이규홍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계속하는 등, 독립운동의 뜻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3월에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1924년 2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929년 6월에 형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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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인동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3.16인동장터 만세운동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3월 16일에 인동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16인동장터 만세운동은 대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인동시장의 가마니 더미 위에서 한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동조하여 시위대가 수백 명으로 불어나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 등이 시위대에게 잉크를 뿌려 잉크가 묻은 사람을 중심으로 무차별 총격과 체포에 나섰다. 결국, 전통 생업에 종사한 젊은 민초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평화적, 비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체포된 청년 중 대다수가 옥고를 치렀다. 이를 계기로, 3월 27일과 4월 1일까지 인동 지역 주민들에 의한 조직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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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섭 추모비
손양섭(1921-1945)은 충청남도 대전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말기 연합군 포로의 감시 요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에 한국인 포로 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사실상 모집이 아닌 강제 징집의 형식으로 포로 감시원 일을 맡게 되었다. 손양섭을 비롯한 3천여 명의 청년들은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군무원 등 1,400명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고, 손양섭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손양섭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와서 2년이 된 1944년 6월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손양섭을 비롯한 한인들을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패할 것을 전망한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한인 군무원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이억관)을 중심으로 중부 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4년 12월 29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려독립청년당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이 책임자가 되어 노병한, 민영학, 조규홍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지하 공작하던 손양섭을 포함하여 한인 6명이 말레이(싱가포르) 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대해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노병한, 민영학과 밤을 새워 사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마땅한 방안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1월 4일, 전출명령에 따라 손양섭 등 전출자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 민영학, 노병학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로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천 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 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암바라와의거에서 형무소장 사살에 성공한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겨서 위생 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활은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일본군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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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추모비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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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사적지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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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묘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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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갑 묘
김재갑(1880-1926)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4월 8일 상주군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화북면 장암동 구장인 이성범, 홍종흠, 이용회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에는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2시경이 되자. 1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문장산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탐지한 상주 일본군 헌병 대장 이하 수많은 헌병들이 와서 시위를 제지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