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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역사거리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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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동상
김구(1876 - 1949)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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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도 3.1독립만세 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하순 용유면 남북리에 살던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이 혈성단(血誠團)의 명의로 부근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등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의 주민이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날 시위에서 조명원(趙明元), 조종서(趙鍾瑞), 최봉학(崔奉學, 1897-1955), 문무현(文武鉉), 김윤배(金潤培), 윤치방(尹致芳), 윤보신(尹寶臣), 류웅렬(柳雄烈, 1897-1940), 오기섭(吳基燮), 구길서(具吉書, 1896-1971), 이난의(李蘭儀, 1885-1957) 등 11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 인천 덕교동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3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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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임시정부 13도 대표자 회의 집결지 표지석
인천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은 1919년 3월 9일 인천에서의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자,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이다. 1919년 3월 7일과 8일 인천부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구,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홍진,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이 임시정부는 상해 및 노령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정부의 하나로서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이다. 13도 대표들은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하여 국민대회 취지를 포고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함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이때 발표된 정부 주요 인사는 이승만, 이동휘 등 24명이었다. 이후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되면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되었다. 홍진(1877 - 1946)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이어서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과 교섭하여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진선이 출범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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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희 동상
길영희(1900 - 1984)는 해방 이후 인천중학교 교장,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평안북도 희천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학년 때 3·1운동에 학생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경성 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 운동 전력 때문에 공립학교 임용을 거절당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을 물러나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장기려(張起呂)·박원선(朴元善)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신념 아래 무감독시험, 개가식 도서관 등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였고 나라의 선비(國士)를 기르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하였다. 5·16으로 1962년 인천중 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청남도 덕산(德山) 가루실에 가루실농민학원 을 설립, 낙향하여 젊은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교육자들 자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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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신 기념물
1946년 5월 경찰당국에서 여경찰을 모집할 때 지원 조건은 20세 이상 35세 이하의 나이,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15세 이상 여성 인구 중 중학교 재학 이상 학력을 가진 여성이 2%에 불과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여경찰의 학력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 여성들이 다시 경찰에 입문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그중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인 전창신(1901~1985)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1946년 조국치안의 선봉에 서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여성피해자 및 피난민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경찰애육원을 설치하여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보호에 주력하였다.퇴임 후 1981~1983년까지 3.1운동 여성동지회 8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 별세하였다. 1992년 정부는 전창신 경감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