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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6일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튿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하급생들에게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3월 8일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일제 경찰에 보고되자, 주도 학생들은 학교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화기를 부수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2002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내에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를 세워 학생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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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집(운석의 터)
장면(1899 - 1966)은 일제강점기에 교육과 문화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광복 후에는 건국에 기여했고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출생지는 서울, 출신지는 인천. 해방 이후에 부산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張箕彬)의 아들이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와 서울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1951년로마 교황청비오12세로부터 성신베스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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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고 항일애국지사 추모명비
가재연(1923 - 1945)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인천상업학교 재학중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한국인 학생끼리 비밀리에 친목회를 조직하고 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교장 야마모도의 억압에 반대하면서, 학교에서 못하게 하는 졸업앨범을 제작하여 졸업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 학교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에 진학한 송재필(宋在弼)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다니는 친구를 방문하여 학병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처에 편지로 연락하다가 충북 영동서에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친목회에 가입하였던 그를 비롯한 고윤희·김여수·김형설·정태윤 등의 동기생들이 1944년 1월부터 속속 영동서에 피체되었다. 이들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전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그는 1945년 3월 29일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태윤(1923 - 1944)은 인천(仁川) 사람이다. 1944년 4월 인천상업학교(仁川商業學校)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학생인 송재필(宋在弼)과 함께 한국인학생친목회(韓國人學生親睦會)에 가입한 바있어 피검되었다. 동년 10월 2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다가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5년 2월 25일 대전형무소에 미결로 수감되어 있으면서 고문의 여독으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여수(1922 - 1945)는 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44년 4월 인천상업고등학교(仁川商業高等學校)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 학생인 송재필(宋在弼)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당시 송재필(宋在弼)과 함께 한국인학생친목회(韓國人學生親睦會)에 가입한 바 있어 피체되었다. 이로인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다가 1944년 10월 2일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5년 2월 25일 대전형무소에 미결로 수감되어 있던 중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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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기념비(서구)
이 기념비는 순국선열과 독립지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숭고한 나라사랑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다. 가로 2m 45cm, 높이 2m로 2개의 형태로 좌측의 조형물은 광복에 대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산을 표현했으며, 우측은 국권 회복과 항일투쟁을 위해 희생하여 되찾은 산하를 의미한다. 기념비 뒤에는 서구 독립운동가 2명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바로 ‘심영택’과 ‘유완무’ 선생이다. 심영택 선생은 당하동 광명마을 출신으로 1920년 주비단을 조직하고,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 유완무 선생은 시천동에서 태어나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김구 선생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으며, 간도의 지리서 〈북여요선〉 간행을 주도했다. 그 밖에도 서구에서 태어난 많은 독립운동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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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 묘
서장관(1898 - 1982)은 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최봉조(崔奉祚)·이진각(李鎭珏)·이용선(李龍善) 등과 함께 가좌면 취야리(茄佐面翠野里)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곳은 옹진군 마산면(甕津郡馬山面)과 장연군 모곡면(長淵郡牡谷面) 방면에서 해주로 들어가는 큰길들이 모이는 곳으로써, 교통이 번잡한 곳이다. 4월 3일 오후 2시, 잡화점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6백여명의 천도교(天道敎)인과 기독교(基督敎)인들이 중심이 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점차 시위군중이 수천명으로 늘어나자,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던 중 출동한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일제 식민통치와 보안법의 부당성·민족자결주의론을 들어 무죄임을 역설하였으나, 이해 10월 25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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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희 동상
길영희(1900 - 1984)는 해방 이후 인천중학교 교장,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평안북도 희천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학년 때 3·1운동에 학생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경성 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 운동 전력 때문에 공립학교 임용을 거절당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을 물러나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장기려(張起呂)·박원선(朴元善)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신념 아래 무감독시험, 개가식 도서관 등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였고 나라의 선비(國士)를 기르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하였다. 5·16으로 1962년 인천중 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청남도 덕산(德山) 가루실에 가루실농민학원 을 설립, 낙향하여 젊은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교육자들 자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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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독립만세기념비
1919년 전국으로 퍼진 3.1독립만세운동은 옹진군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옹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을 전개한 곳은 덕적도였다. 당시 김포군 덕적도에서 사립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林容雨)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로 들어와 있었다. 임용우 선생은 명덕학교 제자인 한․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등과 함께 덕적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섬이라는 특성상 김포처럼 군중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장날’같은 계기가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용우가 제시한 방법은 ‘학교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임용우선생과 이재관과 차경창은 덕적도 각 지역을 돌며 4월 9일 ‘운동회’ 개최를 알렸다. 운동회 장소는 진1리 해변 운동장이었으며, 당일 섬 유지들과 많은 학생 및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오전 중에 운동회와 관련된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진행되었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운동회는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임용우의 독립 연설과 이재관의 격문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참가자 수는 명덕학교, 합일학교의 재학생과 교사, 덕적도 주민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 및 주민들은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진리에서는 뒷산에서 봉화를 피우며 만세를 불렀고 서포리는 국사봉에서, 북리는 주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진행된 덕적도의 독립만세운동은 밤 9시 이후에야 각 마을에서 끝났다. 임용우 선생은 이 날 3.1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용우의 정확한 체포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적도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4월 9일에서 4~5일 지난 다음으로 보인다.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이미 임용우 선생은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철사줄에 묶여 있는 등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다. 이어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더욱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임용우 선생이 체포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임용우 선생과 함께 덕적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수업 중에,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동응과 장기선, 남준기 등이 체포되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렇지만 임용우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5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덕적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4월 9일, 3 ·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적면민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136번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덕적도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임용우와 이재관, 차경창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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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 기미3.1독립만세 기념공원
이곳은 1919년 4월 9일 덕진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공원이다. 1919년 3월 1일 임용우 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로 들어와 제자인 합일학교 선생 이재관, 차경창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9일 덕적도 면 춘계 대운동회에서 왜경 백근이 자리를 비우자 이를 기회라 여긴 임용우 선생이 연설을 하였고 다음에 이재관 선생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마을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을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으며, 임용우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 이겨 그해 5월 10일 3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사후 판결로 임용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이재관, 차경창 선생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룸) 덕적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3.1운동 60주년인 1979년 4월 9일에 덕적면민과 덕우회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현위치)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주민들은 덕적면의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공원 조성을 건의하였으며 옹진군에서는 1979년에 세워진 기미3.1독립만세 기념비를 확장하고, 6.25 전쟁에서 산화한 애국 청년들의 뜻을 기리던 충혼탑도 도우언덕에 이어 밧지름 언덕에 이설되어 관리하던 것을 선현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현재의 위치에 재 이설하여 옹진군민의 역사적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이기 위한 "덕적 기미3.1독립만세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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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우 영세불망비
임용우(1884 - 1919)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최복석(崔復錫)·윤영규(尹寧圭) 등과 월곶면 갈산리(月串面葛山里)·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덕적면(德積面)에 있는 명덕학교(明德學校) 교사로, 이 날 정오경 갈산리에서 최복석이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시위 행진을 벌이고, 오후 2시경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였다. 그는 4월 9일 자기가 재직하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德積島) 해안가에서 개최하여, 여기 모인 많은 학생과 참관자들의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李載寬)·차경창(車敬昌) 등과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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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승 공적기념비
이호승(1878 - 1939)은 1920년대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호승은 상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1922년 4월, 국내로 들어와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원 윤응념(尹應念)을 만나 이듬해 초부터 함께 행동하였다. 그는 윤응념·윤도중(尹度重) 등과 함께 1923년 1월 26일 오후 9시경 부천군 계남면 대응절리에 사는 박주순(朴周淳)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인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종현(朴鍾賢)·김하열(金夏烈) 등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들 또한 가난하여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3월 28일, 이호승은 동지 7명과 함께 부천군 대부면 북일리에 가서 김규환(金圭煥)에게 360원, 면장 김종원(金鍾元)으로부터 120원을 모금하고, 김달원(金達元)으로부터 3,000원의 출금계약서를 받았다. 모금한 돈으로 윤응념은 상해와의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350원으로 배 한 척을 구입하였다. 1923년 5월경 이를 탐지한 경기도 경찰부에 이호승을 포함 동지 9명이 체포당하였다. 이호승은 1923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았으나 1924년 1월 26일 징역 3년 9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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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과 김구 조형물
김구(1876 - 1949)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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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투옥지(인천감리서 터)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개항 후 조선정부는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 새로운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에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1895년 3월부터는 인천감리서 내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개항장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증가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1896년 8월 7일 감리서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 국권침탈로 1906년 9월 24일 인천감리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담당 사무는 그해 10월 1일부터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