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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3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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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병준 묘
부병준(1906-1952)의 호는 백도, 이명은 부건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1세 때 조기 결혼하였으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니혼대학 재학 중 민족주의에 눈을 떴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의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청년총동맹이 파견한 진상 조사위원이 되어 현지에서 동맹 휴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신좌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윈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부병준은 북촌, 구좌면의 동복, 김녕, 월정 지구를 담당하였다. 부생종(夫生鍾)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10월 혁명적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탄로나 조직원이 검거될 때 부병준도 검거되었다. 부병준은 1937년 4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제주문화협회 재일교포 연락 사무를 맡았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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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배 구 묘
김형배(1901-1944)는 제주 사람으로, 이명은 김영배이다.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김시범의 의뢰로 태극기 4매를 만들고 이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 1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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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묘
김경희(1896-1952)는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제주도 조천 지역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촉발시킨 사람은 김장환(金章煥)이었다. 김장환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쫓기게 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6일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김장환은 김시범(金時範)을 찾아 거사를 논의하고, 김경희를 비롯하여 고재륜(高載崙)·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희수(金熙洙) 등의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였는데, 이 날이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3월 21일 1차 시위가 벌어졌는데, 약 5백 명이 참여해 미밋동산까지 행진하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가 신촌리에 이르러 제주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3명이 연행되었을 때, 김경희도 연행되었다. 김경희는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지만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3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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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배 묘
김연배(1896-1923)은 1919년 3월 1일 이래 서울 및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이에 호응하여 3월 23일 이곳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백응선(白膺善)·이문천(李文千) 등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조천리 신도로(新道路)에서 함덕리(咸德里)에 이르는 길에 운집한 다수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 다음날인 24일에도 함덕리 시장에 운집한 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누비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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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
3.1운동기념탑은 1919년 일어난 제주 3.1운동에 참여한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세운 탑이다. 제주 3·1 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조천의 유림 세력들은 전국의 독립운동 시위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당시 조천 출신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 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장환·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은 3월 17일경 조천리 미밋 동산에서 거사를 결행할 것을 다짐하고 3월 19일까지 고재륜(高載崙)·김형배·김연배·황진식(黃鎭式)·김용찬·백응선(白膺善)·박두규·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 1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장과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날이 밝자 미밋 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김시범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천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제주성 내를 향하여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시범·김시은·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되었다. 3월 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박두규·김필원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전날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주동자는 연행되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3월 23일에도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다시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백응선·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다. 3월 24일 조천 오일장날에도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이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고 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 14명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만세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만세 시위 운동으로 1심에서 29명이 기소되어 그중 23명이 1919년 4월 26일 광주 지방 법원 제주 지청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다시 공소하여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 법원 형사 제1부에서 김시범과 김시은은 각각 1년형, 김용찬과 고재륜은 각각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 14명은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고, 조천에서 교직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주 3·1 운동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 출신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 지역에서 민족 교육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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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성 구 묘
김시성(1910-1943)의 호는 석연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선배가 부당한 이유로 퇴학당하자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고, 동맹을 주도한 대표 학생 25명과 함께 퇴학당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영어학교에 유학하고 있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김시성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성진회(醒進會)에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광주로 체포되어 왔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창립되었으나 기밀 누설을 우려하여 1927년 3월 형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동지들은 몰래 회합하여 사회 과학 이론을 연구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하였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미결 기간까지 합쳐 1년 6개월 넘게 옥고를 치렀다.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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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배 구 묘
김연배(1896-1923)은 1919년 3월 1일 이래 서울 및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이에 호응하여 3월 23일 이곳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백응선(白膺善)·이문천(李文千) 등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조천리 신도로(新道路)에서 함덕리(咸德里)에 이르는 길에 운집한 다수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 다음날인 24일에도 함덕리 시장에 운집한 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누비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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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준 구 묘
김문준(1894-1936)의 호는 목우이며, 1919년 제주3.1운동을 주도했던 항일운동가이다. 1910년 3월에 사립 의신학교(義信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2년에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 수원고등농업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1895~1974]·이훈구(李勳求)[1896~1961]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3월에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이후 1918년 4월까지 정의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으며 공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있는 중앙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의 전신)에서 근무하였으며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제주3.1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9월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또 일본 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 서부전기노동조합 등 각종 노동조합을 결성해 파업을 주도하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오사카지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9년 가을에는 오사카 치안당국이 김문준의 우수한 지도로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1만 7천여 명의 조합원을 가지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문준은 1929년 7월에 제주도 출신 소년들을 중심으로 오사카 조선소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인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의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 화학노조로 해소하고 같은 해 5월에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로 바꿔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사카지부의 선전물이었던 『뉴스』 및 격문과 『제2무산자 신문』 등을 배포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공산당의 확대 강화를 지도하였으며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신문』을 발행하였다. 1930년에는 오사카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1932년 4월에는 오사카공소원에서 2년 6월을 선고받아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편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1908~?]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에는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에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일본인 좌익단체와 합동으로 치렀고,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준 시신을 제주도로 운구하겠다고 하자 일제 경찰이 막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조천으로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 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김문준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들을 위해 노동조합 운동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노동운동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탁월한 노동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 압박에 투쟁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여한 인사들을 위해 오사카성[大阪城] 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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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종 구 묘
해당 비석은 1936년 28세로 목포형무소에서 순국한 부생종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동지들이 묘 비문에 옥사(獄死)라 새겨 세웠으나 '옥사'라는 글귀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심으려는 것이라 하여 동지들은 다시 잡혀가 옥고를 치렀고 비석은 조천주재소 창고에 압수되었다. 할 수 없이 '夫生鍾之墓'라고만 새긴 매우 작은 비석을 세웠다가 해방이 되자 지서 창고에서 그 비석을 찾아다 다시 세웠었는데, 1982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나서 1984년 북제주군수 명의로 '殉國烈士夫生鍾之墓'라는 커다란 비석이 다시 세워지면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출하던 그 비석은 우리 고장의 관습에 따라 무덤 앞에 묻어 버렸다. 2006년에 다시 꺼내어 산담 옆에 세워 두었다가 2008년에 조천리 항일기념관으로 가져다가 다른 비석들과 함께 마당에 세웠다.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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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탁 구 묘
김순탁(1895-1938)은 1919년 3월 제주 조천(朝川)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8년에는 제주청년동맹지부(濟州靑年同盟支部) 신좌소비조합(新左消費組合)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夜學)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도내의 유지인 김시우는 김장환과 함께 여러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며, 미모치(味毛峙: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에서 3월 21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순탁을 비롯한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였다. 김시우가 큰 태극기를 미모치에 세우고 목메인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선언이 끝나고 김장환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각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창하며 큰 길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 긴급 출동한 수 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1928년 제주청년동맹지부 신좌소비조합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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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 추모탑, 창열사
애국선열 추모탑은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탑으로서 고유한 제주의 정주문(정남)은 이 지역만의 수 천년동안 내려오는 세계적인 독특한 문이며, 모든 문화가 교류하는 우리 제주의 문으로 상징한다. 높다란 양 기둥은 음양조화를 이룬 정주탑으로 천,지,인과 우리 고장의 삼무, 삼청의 뜻을 표현하였고 평화를 염원하는 탑으로도 상징한다. 좌우 양쪽 부조에는 선열들의 구국운동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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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장터 만세시위지 - 만세로
조천장터 만세시위는 제주 3.1운동인데, 제주 3·1 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고, 조천의 유림 세력들은 전국의 독립운동 시위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당시 조천 출신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 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장환·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은 3월 17일경 조천리 미밋 동산에서 거사를 결행할 것을 다짐하고 3월 19일까지 고재륜(高載崙)·김형배·김연배·황진식(黃鎭式)·김용찬·백응선(白膺善)·박두규·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 1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장과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날이 밝자 미밋 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김시범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천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제주성 내를 향하여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시범·김시은·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되었다. 3월 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박두규·김필원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전날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주동자는 연행되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3월 23일에도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다시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백응선·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다. 3월 24일 조천 오일장날에도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이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고 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 14명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만세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만세 시위 운동으로 1심에서 29명이 기소되어 그중 23명이 1919년 4월 26일 광주 지방 법원 제주 지청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다시 공소하여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 법원 형사 제1부에서 김시범과 김시은은 각각 1년형, 김용찬과 고재륜은 각각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 14명은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고, 조천에서 교직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주 3·1 운동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 출신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 지역에서 민족 교육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