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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보 묘
강창보(1902 - 1945)는 제주도 사람이다. 1920년대 초 서울에서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1924년 고향 제주로 내려가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제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신사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 4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청년동맹을 결성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조직에 힘썼으며, 동년 8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제주도 야체이카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경기도 검찰부에 넘겨져 2년여 동안 구금되어 고초를 치르다가 1930년 12월 2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초 제주도로 돌아 온 그는 제주읍(濟州邑, 현재 제주시)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갖으며, 조직원을 확보하고 사회주의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청년동맹(靑年同盟) 출신 신재홍(申才弘)·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 제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야체이카는 1931년 9월 세금불납운동, 강제묘목배포 반대투쟁 등을 지도했으며, 일제강점기 어업 노동자의 투쟁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인 1932년 1월 해녀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해 3월 일경에 체포된 그는 유치소에서 탈출한 후, 일본 오사카[大阪]로 피신하였다. 이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는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朝鮮新聞』의 발간을 지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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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관순 집
강관순(1909 - 1942)은 제주 사람이다.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영명학교 교사로서 야학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30년 3월 제주도 구좌면(현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서 신재홍. 오문규 등과 함께 비밀결사 혁우동맹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혁우동맹은 제주청년동맹과 그 산하지부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비밀결사 형태로 새롭게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였다. 혁우동맹은 주로 청년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고취 및 대중 계몽을 활동의 주요 방침으로 정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청년부 책임을 맡아 청년단원 포섭에 힘을 쏟았다. 혁우동맹은 1931년 6월 상순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로 새롭게 조직을 정비해 갔는데, 그는 당외기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제주도야체이카는 구좌면 등지의 해녀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사회 각 방면의 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932년부터 구좌면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주 해녀의 항일시위운동에는 제주도야체이카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해녀어업조합의 어용화와 해산물 매수가격을 둘러싼 부정에 항의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000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까지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등 그 여파가 거세지자, 해녀 및 청년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하였다. 해녀대표 3인을 구속하고, 해녀시위의 배후조직으로 강창보를 비롯한 100여 명의 사회주의 운동가를 체포하였다. 강관순은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가를 데리고 함경도 청진으로 이사했으나,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1943년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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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牛島海女抗日運動記念碑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제주 해녀 수천명이 비창을 들고 일어서서 싸운 적이 있다. 1932년의 투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여명이 궐기한, 어민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우도해녀항쟁기념비에는 1932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우도의 선구자인 강관순이 작곡한 해녀가가 실려 있다. 우도출신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지어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우도에서는 1931년 1월 강기평(康基平), 강순인(姜順仁), 강창순(康昌順) 등이 대표로 세화장터의 항쟁에 참가했다. 우도 포구에 있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牛島海女抗日運動記念碑에는 당시 우도 해녀들이 불렀던 강관순(康寬順)이 지은 海女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이 노래는 일제 때 지어진 것으로 창가라고 지칭되는 곡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해녀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 노래를 부를 줄 알았다고 하며 지금도 노인들은 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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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평국 집
강평국(1900-1933)의 본명은 강년국(姜年國)이며,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1910년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에 입학하여 1915년 3월 제1회로 졸업했다. 1918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다. 동급생들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女修園)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朝鮮總督暴壓政治) 폭로연설회(暴露演說會)’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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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중학원
1947년 3월1일, 제주농업학교, 제주여중, 오현중학원 등 학생들이 모여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를 오현중학원에서 개최하였다. 이 집회는 그날 제주북초등학교 집회를 주도한 3.1절기념투쟁위원회와는 별도로 1947년 2월 24일 결성된 각급학교 3.1절기념준비위원회가 주도하였다. 이곳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시위행렬을 이루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집회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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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로 표지석
승천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제주에서도 1909년 2월 25일에 고사훈(의병장이 되면서 승천으로 개명), 이석공(의병장이 되면서 중심으로 개명), 김석윤, 고상옥, 조병생, 김재돌, 약남석, 양만평, 김만석, 한영근등이 모여 국권수호를 위해 고승천, 이중심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각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3월3일 관덕정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 전도에 격문을 사발 공문으로 돌리고, 의병장 고승천과 의병 김만석은 대정으로 가서 의병 300여명을 모병하여 2월 28일 제주로 오다가 대정 동광청리에서 왜경을 급습당하여 항거하다 중과부적으로 3월 1일 의병장 고승목과 의병 김만석이 체포되어 회유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3월 4일 대정 동문밖에서 왜경에 사살순국하시다. 당시 의병장 고승천님 집은 의병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이었는데 왜경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도로를 승천로로 명명함은 선열의 구국정신을 기념하고 후세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며 계승하고자 광복회 제주도지부의 요청에 의해 제주시는 1997년 고산로~간드락 구간의 도로명을 승천로로 부여하였다. 2000년 2월 새주소부여사업 실시에 따라 현재의 승천로는 연산로~간드락 구간으로 변경되었으나 이 표석 설치된 바로 인접에 의병장 고승천님의 생가가 있어 이곳에 표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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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적거 유허지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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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응선 묘
백응선(1896-1920)의 호는 천야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시위 운동에서 주동자 9명이 체포된 후, 백응선은 박두규(朴斗圭)·김필원(金弼遠) 등과 더불어 3월 22일 제2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시위에서 박두규·김필원이 체포되었다. 3월 23일 제3차 시위가 조천 장터에서 시발되었고,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함덕리까지 행진하였다. 백응선은 김년배(金年培)·이문천(李文千) 등과 더불어 제3차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문천 등 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년 3월 28일 네 살 된 딸 하나를 남겨 두고 25살로 요절하였다. 1921년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고 백응선을 기리는 비석을 묘지에 세웠다. 비석 정면에는 고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라고 쓰고 측면에 13명 동지의 이름을 썼다. 정부는 199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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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탁 묘
김순탁(1895-1938)은 1919년 3월 제주 조천(朝川)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8년에는 제주청년동맹지부(濟州靑年同盟支部) 신좌소비조합(新左消費組合)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夜學)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도내의 유지인 김시우는 김장환과 함께 여러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며, 미모치(味毛峙: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에서 3월 21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순탁을 비롯한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였다. 김시우가 큰 태극기를 미모치에 세우고 목메인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선언이 끝나고 김장환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각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창하며 큰 길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 긴급 출동한 수 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1928년 제주청년동맹지부 신좌소비조합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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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 묘
김시은(1887-1957)의 호는 농산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제주에도 그 영향이 미쳐왔다. 제주 출신 김장환(金章煥)은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쫓기게 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조천으로 왔다. 조천 지역 유지 숙부 김시범(金時範)에게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모았다. 14인의 동지는 김시은을 비롯하여 김시범·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거사일은 3월 21일로 결정되었고, 신촌리·함덕리 등의 인근 마을에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려주며 모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시은은 김시범·김장환·황진식 등과 함께 제주성내로 행진을 강행하여 신촌리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경찰 30여 명과 충돌하였고, 김시은 등 13명이 체포되었다. 김시은은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 4월 8일 만기 출감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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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추모비
김재동(1910-1932)은 1931년 1월 15일 도쿄에서 함덕리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영섭(韓永燮)이 사망하여 1월 19일에 시신이 고향에 도착하자 동지장(同志葬)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1월 22일 한영섭의 할아버지 한정권(韓程權)의 집에서 대흘리 장지까지 운구하면서 동지들과 적기가(赤旗歌)를 합창하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1931년 5월 6일 조천읍 경찰관 주재소 순사 2명이 한영섭의 아버지 한문옥(韓文玉)에게 본서의 명령이니 아들의 관(棺) 속을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장지로 가서 흙을 파고 관 안을 수색하였으나 불온 문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재동은 동지들과 함께 한영섭의 추모비를 세웠는데, 일본 경찰이 비석의 문구가 불온하여 안녕 질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비석을 뽑아내어 압류하고 김재동을 체포하였다. 1931년 8월 5일에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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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병준 기념비
부병준(1906-1952)의 호는 백도, 이명은 부건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1세 때 조기 결혼하였으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니혼대학 재학 중 민족주의에 눈을 떴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의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청년총동맹이 파견한 진상 조사위원이 되어 현지에서 동맹 휴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신좌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윈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부병준은 북촌, 구좌면의 동복, 김녕, 월정 지구를 담당하였다. 부생종(夫生鍾)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10월 혁명적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탄로나 조직원이 검거될 때 부병준도 검거되었다. 부병준은 1937년 4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제주문화협회 재일교포 연락 사무를 맡았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