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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붕해 묘
강붕해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8년 겨울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羅神父: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에게,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발진하여 중국의 상해(上海) 남경(南京) 방면을 도양폭격(渡洋爆擊)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행장 지하실에 폭탄을 저장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에 제공하였다. 또한 1939년 9월경에도 나 신부에게 "중국군 비행기가 전라남도 목포(木浦)에 폭격하러 왔다가 일본 해군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말하였고, 1941년 9월경에는 "중국에 출정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적고, 오히려 다수의 군대는 소련 및 영미와 일전을 벌이려고 대기 중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을 통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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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근 묘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光州府)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강봉근(1908 - 1968)은 전라남도 여수공립수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남은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천명했으나, 그를 포함한 2학년 11명, 1학년 9명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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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공로비
당시에는 12세부터 늙은이까지 해녀뿐 아니라 남자들도 나서서 미역을 나르고 말리는 일을 협력했다고 한다. 이렇게 눈보라와 추위를 뚫고 채취한 미역으로 마련한 기금을 보태어 1951년 2월 23일 가교사 4개 교실을 신축하게 되고 그해에 제1회 졸업생이 배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육지로 물질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한글 해득 도장이 찍힌 양민증이 필요한 시대였다. 당시는 해녀들의 사상이 온건하면 양민증을 주었다. 양민증에는 한글 해득/미해득을 표기하는 난이 있어서 한글해득이 되면 육지에 나가서 물질할 수 있도록 출타 허가를 해주었다. 이 시기 1954년에 이 학교에 부임한 고창호(우도 출신) 교사는 30~50세 되는 부녀자 50여명을 모아 놓고 한글교육을 시켰다. 이는 일제 강점기 온평리에는 야학소가 운영돼 마을 청년들이 야학 교사로 나서 민족정신과 한글을 가르쳤던 전통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해득 판정을 받았다. 고창호 교사는 교육을 받은 해녀들에게 바다에서 딴 미역의 일부를 학교 건립 자금으로 내놓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해녀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마을 전체 총회를 거쳐 마을의 허락도 얻어냈고 다른 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정하였다. 학교바당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로부터 1958년까지 학교 신축 기금을 해녀들이 마련하였다. 1960년 온평초등학교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3개의 기념비를 세울 때에는 제외되어 해녀들의 이런 노력이 곧바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 비석은 해녀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뒤인 1961년이 되어서야 온평초등학교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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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동화 대종사비
방동화(1887 - 1970)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 승려로 1918년 10월 5일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 등과 함께 항일무력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종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3년 육지로 건너가 경상도 일대의 기림사(祈林寺)·대승사 등지의 사찰에서 득도한 뒤 1918년 봄 법정사에 돌아와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방동화는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 등과 함께 승려를 중심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점차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고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방동화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붙잡힌 후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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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유적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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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생 묘
박인생(1903 - 1929) 선생은 제주 출신이다.광주공립농업학교(光州公立農業學校)를 나와 1926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출신 장재성(張載性)·왕재일(王在一) 등과 학생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은 평소에 일제의 조선 지배에 반감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으며 민족의식이 강했고, 당시 지식층 사이에서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성진회는 ①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②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③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박인생은 동회의 서기를 맡아 회의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성진회는 회원 중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결사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전술상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비밀보장을 위해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들 구성원들은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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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공적비
윤영석 공덕비는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71에 위치한다. 윤영석(1916 - 2003)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이명은 윤남의이다. 1926년 10월부터 예산지역의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활동하였다. 윤영석은 윤봉길의 동생으로 윤봉길이 1926년 10월 조직한 각곡독서회(角谷讀書會)에 가입하고, 1929년 3월 28일 일본침략정책을 풍자한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다. 그리고 4월 8일에는 윤봉길이 야학생 중심으로 조직한 월진회(月進會)에 가입하여 농촌개혁운동과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0년 3월 15일 윤봉길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로는 그가 월진회를 이끌며, 토론회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그는 윤봉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그의 거사를 깨닫고 윤봉길이 직접 쓴 농민독본(農民讀本)·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월진회취지서(月進會趣旨書) 등을 천장에 극비 보관하였다. 1932년 5월 정종호(鄭鍾浩)가 만든 예산농고(禮山農高) 독서회 조직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런데 1932년 12월 정종호가 예산농고 독서회 사건으로 붙잡히고 조사가 확대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1933년 1월 중순 경 출가(出家)하여 해방될 때까지 선의(璇儀)라는 가명을 가지고 피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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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윤 묘
오병윤(1901 - 1973) 선생은 제주 출신이다.그는 제주도 법정사(法井寺) 신도로 1918년 10월 6·7일 김연일(金蓮日) 등과 함께 서귀포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해 방화·파괴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1918년 9월 19일 제주도(濟州島)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 법정사 승려 김연일은 오병윤 등 신도 30명에게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했을 뿐 아니라 병탄 후에는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을 섬 밖으로 몰아내자”는 내용의 연설로써 반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이어 동년 10월 5일, 오병윤 등 신도 33명은 군사 대오를 편성하고 각 면(面) 면장들에게 격문을 보낸 후, 주민 400여 명을 규합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일경 주재소를 습격·파괴하며 일인들을 포박·구타하는 등 이틀 동안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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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동화 기념비
방동화(1887 - 1970)는 1918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법정사 항일 운동에 참여한 항일 운동가이다.방동화는 한학을 배우다가 관음사의 승려였던 김석윤과 강창규가 자신들의 스승인 박만하가 있던 경주의 기림사로 보냄에 따라 거기에서 출가하였다. 방동화는 기림사 승려였던 김연일·정구용 등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법정사에서 승려로 활동하였다. 1914년부터 김연일이 법정사 주지로 활동하며 법정사 신도들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동안 방동화는 박주석을 초빙하는 등으로 김연일을 도와 법정사 항일 운동을 계획하는 활동을 하였다. 거사를 위한 조직에서 방동화는 좌대장을 맡아 총지휘자인 김연일을 보좌하였다. 1918년 10월 7일 법정사 예불일의 새벽 기도를 마치고 34명의 선봉대가 거사를 실행하였다. 방동화는 거사 현장에서는 피신하였다가 한 달여의 은신 후 체포되어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제주도 하원리 원만암에서 불교활동을 재개하여 제주불교계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제주불교연맹 활동,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불교 제주교구 교무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한불교 제주교무원 교무회의장도 역임하였다. 방동화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에 대한 공훈으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건립된 의열사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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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호 기념비
조봉호(1884~1920)는 제주 성내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온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모의하여 독립희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하고 임정헌장과 해외 통신문 등을 유인하며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려다가 1919년 7월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919년 11월 12일 징역 1년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에서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77년 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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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 의병항쟁기념탑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 등 10 명의 구국지사들이 발의하여, 1909년 3월 3일을 기해 관덕정 광장에 집결, 일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비밀이 탄로나 실패로 끝나버린 제주 의병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제주의병항쟁은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高仕訓 일명 承天(승천), 景志(경지)), 이중심(李中心 일명 錫公(석공))과 격문 작성자로 창의에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 김석윤(金錫允 일명 석명(錫命), 勤受(근수)) 그리고 김만석(金萬石 일명 光一(광일))·노상옥(盧尙玉)·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조병생(趙丙生)·양만평(梁萬平)·한영근(韓永根) 등 10명의 발의로 벌어졌다. 제주의병항쟁은 만인(萬人)의 의병을 규합, 1909년 3월 3일을 기하여 관덕정 광장에 집결, 일본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모병단계에서 비밀이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제주의병항쟁은 제주항일운동사에서 볼 때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이 의병항쟁기념탑은 바로 이러한 의병 창의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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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만 추모비
고사만(1908 - 1962)은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고사만은 1927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했다. 1930년 그는 문도배(文道培)·신재홍(申才弘) 등과 혁우동맹(革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농민부·청년부·소년부·여성부를 편성하여 분야별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유재산제도와 일본제국주의를 부인하는 사회주의 선전에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 조직 등에 나선 고사만은 혁우동맹을 해소시키고 농민단체와 해녀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주지역에서는 민족적 열기와 식민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1931년 1월 제주에서는 해녀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관제적인 해녀어업조합에 반대하고 있던 해녀들은 1천여 명의 시위대로 일경에 맞섰다. 이때 고사만은 해녀들의 항일운동 배후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이 지연되는 가운데 1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