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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0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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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사 3.1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광양읍 시장에서 서경식·박용래· 정귀인 등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1천여명의 군민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서경식(徐璟植, 1886~1938), 박용래(朴龍來, 1894~1951), 김상후(金尙厚, 1870~1944), 정귀인(鄭貴仁, 1885~1946)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양향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6년 1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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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학 기념비
황병학(1876-1931)은 1906년 7월 26일 산포수 2백여명을 규합하여 백운산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망덕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10척의 일본 선박을 공격하여 침몰시켰으며 일본군을 사살해 총기 등을 압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이후, 광양, 여수, 순천 등에서 의병투쟁을 마주치다 옥곡원에서 일본 헌병과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일제 강제 병탄을 당하자 황병학 의병부대는 의병을 해산하고 숨어 있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은 김철 중국에서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1년에는 옥고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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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추모비
매천 황현 선생은 장수(長水) 본관이며 운경(雲卿) 자와 매천(梅泉)이란 호를 가진다.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자랐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시문에 능했다.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4편의 저작과 함께 남겼다.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고, 이듬해 <매천집>과 <매천야록>이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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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시비
이육사(1904-1944)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록, 본명으로 원삼 또는 개명 활을 사용하며 '육사'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다.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워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1925년에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1926년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이어가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육사'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옥에서 풀려난 후에는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루쉰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후에는 신조선에서 시 "황혼"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하였고, 이후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논문과 시나리오 작업을 하였다. 1937년에는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유명한 시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하였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하였으나, 6월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4년에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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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시비
이병기(1892-1968)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1927년 2월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같이 "한글사(社)"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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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시비
영랑 김윤식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康津面) 남성리(南城里) 자택에서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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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
함북 청진(淸津)출신으로 1936년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민족학교인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한 후 광명중학교(光明中學校)에 진학하여 시(詩)작품을 통한 항일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았다.1938년 그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진학한 후 송몽규(宋夢奎) 등과 함께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서시(序詩)>·<별헤는 밤>·<무서운 시간>·<또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년 경도(京都)에 있는 동지사(同志社)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한 후 동지인 송몽규·장성언(張聖彦) 등과 만나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을 담은 시작품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는데 힘썼으며 민족문화의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그는 1944년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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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묘(매천역사공원)
황현(1855-1910)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강 위(姜 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에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 황 현의 글이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황 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 청국의 적극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에서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 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 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황 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서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중국에의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내용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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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집
황현(1855-1910)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강 위(姜 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에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 황 현의 글이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황 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 청국의 적극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에서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 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 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황 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서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중국에의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내용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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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7의사 3.1운동 기념비
전라남도 광양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김영석(金領錫)·최준수(崔俊秀)·서성식(徐聖植)·서찬식(徐贊植)·이기수(李基壽)·박병원(朴炳元)·나종길(羅鍾吉) 등 7명의 젊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 4월 1일 옥룡면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기단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과 두 마리 용을 새긴 옥개석을 얹은 형태로 높이는 2.6m, 너비는 0.6m이며, 부지 면적은 6㎡이다. 비신의 앞면에는 '칠의사삼일운동기념비(七義士三一運動記念碑)'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20세 안팎의 젊은 애국지사들의 위국충의(爲國忠義)를 후세에 전하는 비문이, 왼쪽 옆면에는 7명의 이름이 그 후손의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다. 원래 옥룡면사무소 부근에 세웠던 것을 옥룡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전몰호국용사추모비와 함께 나란히 세웠으며, 2003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광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7일 옥룡면의 유생 정성련(鄭星鍊)이 광양읍 장터에서 단독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4월 1일에도 광양읍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검속되었다. 옥룡면 운평리의 서당 견룡재(見龍齋)에서 백중기의 가르침을 받던 김영석·최준수·서성식·서찬식·이기수·박병원·나종길 등 7명은 선배들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2일, 이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심한 폭행을 당하였으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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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귀인 기적비
정귀인(1855-1946)은 전남 광양(光陽) 사람이다.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에서 1919년 4월 1일 서경식(徐璟植)·박용래(朴龍來) 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광양군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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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련 기념비
정성련(1879 ~ 1923)은 전남 광양(光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광양읍(光陽邑)에서 장날에 단독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계획하여, 태극기 3매를 만들어 거사일인 장날 장터로 나가서 수백명의 장꾼 앞에서 태극기를 장대에 메어 머리 위에 높이 들고 흔들며, '만세 만세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