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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의소 훈련장 막사
이곳은 1907년 ~ 1909년까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쌍산의소 의병들이 훈련하고 생활했던 막사터이다. 쌍산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대한제국기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창의소이며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倡義所)이다. 화순 계당산(桂棠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의진(義陣)은 원래 1907년 음력 3월 9일 양회일(梁會一)·임창모(林昌模)·안찬재(安贊在)·이백래(李白來)·임노복(林魯福)·임상영(林相永) 등이 주축이 되어 거병하여 능주(綾州)와 화순 관아를 공격하며 무장을 강화하였으나, 도마치(刀摩峙) 전투에서 패전하자 의병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이후 풀려나 다시 재거를 도모하였는데, 임창모·안찬재·이백래·안규홍(安圭洪)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임창모부자와 안찬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쌍산의진(雙山義陣)은 1909년 증동(甑洞)·묵석동(墨石洞)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그들의 창의는 호남지역 의병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의병유적으로는 쌍산의소 본부와 군기제조소지(軍器製造所址)·의병성지(義兵城址) 및 막사터 등이 있다. 쌍산의소 본부는 이 마을의 개인 소유 가옥인데 의병지도자들이 모여 창의를 계획하고, 의병처의 본부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199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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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의소 무기제조소
이곳은 1907년 ~ 1909년까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면서 직접 무기를 제작하던 곳이다.쌍산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대한제국기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창의소이다.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倡義所)이다. 화순 계당산(桂棠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의진(義陣)은 원래 1907년 음력 3월 9일 양회일(梁會一)·임창모(林昌模)·안찬재(安贊在)·이백래(李白來)·임노복(林魯福)·임상영(林相永) 등이 주축이 되어 거병하여 능주(綾州)와 화순 관아를 공격하며 무장을 강화하였으나, 도마치(刀摩峙) 전투에서 패전하자 의병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이후 풀려나 다시 재거를 도모하였는데, 임창모·안찬재·이백래·안규홍(安圭洪)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임창모부자와 안찬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쌍산의진(雙山義陣)은 1909년 증동(甑洞)·묵석동(墨石洞)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그들의 창의는 호남지역 의병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의병유적으로는 쌍산의소 본부와 군기제조소지(軍器製造所址)·의병성지(義兵城址) 및 막사터 등이 있다. 쌍산의소 본부는 이 마을의 개인 소유 가옥인데 의병지도자들이 모여 창의를 계획하고, 의병처의 본부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199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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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은거지 표지석
이곳 화학산 바람재 동굴은 1907년~1909년까지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심남일(1871~1910) 의병장이 은거해 있다가 1909년 10월 9일 선봉장 강무경 등과 함께 체포된 곳이다.심남일(1871 - 1910)은 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 자가 남일(南一)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여, 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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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해 유적비
양재해(1854 - 1907)는 1906년 면암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하자 이에 호응하여 남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고 최익현·임병찬 등은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양제안 등 12명은 일본 헌병사령부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태형 100대를 받았다. 이러한 옥고의 여독으로 석방된지 1년 만에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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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달환 사당(충의영당)
문달환(1851 - 1938)은 문달환의 본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남도 화순(和順)에 거주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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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달환 기적비
문달환(1851 - 1938)은 문달환의 본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남도 화순(和順)에 거주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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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사 사적비
춘산사는 문달환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문달환(1851 - 1938)은 문달환의 본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남도 화순(和順)에 거주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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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부대 돌정지 전투지 표지석
심남일(1871 - 1910)은 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 자가 남일(南一)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다.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여, 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 일대는 제2차 호남의병봉기 때(1907~1909)인 1908년 11월 21일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그는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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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대
기미년(1919년) 3월 15일 화순읍 연동에 있는 갱무산(현재 개미산)인 이곳에서 남리 조국현(당시 19세)의 주동으로 연동서당의 학우였던 조경환(曺庚煥), 조기현(曺基賢)등과 마을주민 노형규(盧衡圭), 조경렬(曺庚烈), 차성태(車成泰)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남리 조국현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높이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갱무산의 만세소리가 펴저 나가자 읍내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헌병들은 곧 출동하여 왔고 일헌의 모습이 보이자 남리는 태극기를 말아 몸을 피했다. 조경환, 조기현, 노형규, 조경열등은 일헌에 붙들려 곤욕을 치러야 했고 화순을 빠져나간 남리 조국현은 충청, 경기등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겪는 중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그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9년에 화순군에서 만세대를 건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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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산 삼일 만세 운동 터 기념비
1919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연양리 연동 마을 근처 갱무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5일 조국현의 주도로 일단의 청년들이 당시 화순군 화순면 소재지 인근의 야산인 갱무산에 올라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만세 사건으로 일부 참여자들이 체포되었다. 갱무산 독립 만세 운동은 화순 지역에서 3월 13일에 일어난 능주 장터 시위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만세 운동이었고, 화순읍 일원에서는 비교적 두드러진 만세 운동이기도 했다. 1919년 당시 24세였던 조국현은 갱무산 아래의 연동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3월 15일 당일 조국현은 서당 친구들인 조경환·조기현, 그리고 연동 마을에 사는 노충규·조병열·차성태와 함께 갱무산에 올라갔다. 조국현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치켜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화순 읍내의 헌병들은 현장에 출동했고 헌병들의 출동을 지켜본 조국현은 도주했다. 그러나 함께 산에 오른 조경환 등 나머지 5명은 헌병에 붙들려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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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추모비
양한묵(1862 - 1919)은 일제강점기 탁지부주사, 능주세무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 전라남도 해남 출신. 양상태(梁相泰)의 아들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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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묘
양한묵(1862 - 1919)은 일제강점기 탁지부주사, 능주세무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 전라남도 해남 출신. 양상태(梁相泰)의 아들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