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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0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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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진 유적비
정영진(1856 - 1919)은 대한제국기 화순, 곡성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화순·곡성 지역에서 의병에 참가하였다. 1907년 7월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으로부터 의병모집의 의뢰를 받았다.같은 해 8월 박경선(朴京善)·강원숙(姜源淑)·박화중(朴化中)·김산안(金山安) 등 4명을 모병, 의병장 고광순 진영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곡성에서 조진규(趙晋奎)가 가지고 있는 총을 탈취, 의병에 가담한 강원숙에게 인도한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08년 9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형 5년의 고초를 겪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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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총 공적비
양회총(1919 - 1993)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으로, 이명은 양회종이다.화순군에 잇는 이서(二西)공립보통학교에 재학중인 1936년에 일제의 민족차별교육과 조선학생에 대한 노역(勞役)동원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또 동교의 일인(日人)교장을 쫓아내는데 앞장섰다.그후 이러한 이유로 국내에서 진학이 어렵게 됨으로써 도일(渡日)한 그는 동경 소재 정칙중학교(正則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37년 7월에 항일의식을 적은 일기장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40여일 동안 구금되었고 동교를 퇴학당하였다.그 뒤 다시 일본 천엽현(千葉縣) 소재의 명륜중학교(明倫中學校)에 들어갔는데, 이때에는 항일단체인 「라비트그룹」의 간행물인 〈전쟁과 평화〉에 항일기사를 기고하면서 항일활동을 벌였다.그런데 1939년 8월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는 도중 그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9개월간 구금된 상태에서 곤욕을 치르다가 1940년 5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이 일로 그는 또 퇴교를 당했다.그후 다시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43년 9월에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무렵 일제는 소위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면서 조선인 학생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는데 이때 이를 피해 만주로 갔던 그는 그곳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본국으로 송환되어 소집영장을 받았으나 신분증을 변조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 후배인 박진철(朴眞哲)의 하숙에 기거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1944년 5월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성도회(醒道會)를 조직하고, 동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동회의 주요활동은 동포학생들을 상대로 민족독립사상을 고양시키는 것과 학병지원 반대 등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된 회원을 통하여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폭탄제조 계획도 세웠다.그런데 1944년 9월에 동회의 활동이 일본 헌병대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혔다. 붙잡힌 후 삽곡(澁谷) 헌병대로 끌려가 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1월에 소압(巢鴨)형무소에 이감되었는데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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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집
양회일(1856 - 1908)은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이다.시문(詩文)에 능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아 오던 양회일은 1907년 군대해산의 충격과 이로 말미암은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양열묵(梁烈默)·이동화(李東華) 등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의하였다.이들은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능주(綾州)읍을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여 총 5정을 빼앗았다. 그 여세를 몰아 광주(光州)를 치고자 계획하였다. 먼저 화순(和順)까지 진격하여 군아와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한 후 동복(同福) 방면으로 진격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이곳 화순과 동복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에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하고 외치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나주(羅州)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에 재차 의거하여 강진(康津)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왜병에게 체포되어 광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장흥(長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하여 단식 7일만에 마침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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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순의비
양회일(1856 - 1908)은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이다.시문(詩文)에 능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아 오던 양회일은 1907년 군대해산의 충격과 이로 말미암은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양열묵(梁烈默)·이동화(李東華) 등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의하였다. 이들은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능주(綾州)읍을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여 총 5정을 빼앗았다. 그 여세를 몰아 광주(光州)를 치고자 계획하였다. 먼저 화순(和順)까지 진격하여 군아와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한 후 동복(同福) 방면으로 진격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이곳 화순과 동복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에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하고 외치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나주(羅州)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에 재차 의거하여 강진(康津)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왜병에게 체포되어 광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장흥(長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하여 단식 7일만에 마침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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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묘갈비
양회일(1856 - 1908)은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이다.시문(詩文)에 능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아 오던 양회일은 1907년 군대해산의 충격과 이로 말미암은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양열묵(梁烈默)·이동화(李東華) 등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의하였다.이들은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능주(綾州)읍을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여 총 5정을 빼앗았다. 그 여세를 몰아 광주(光州)를 치고자 계획하였다. 먼저 화순(和順)까지 진격하여 군아와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한 후 동복(同福) 방면으로 진격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이곳 화순과 동복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에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하고 외치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나주(羅州)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에 재차 의거하여 강진(康津)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왜병에게 체포되어 광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장흥(長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하여 단식 7일만에 마침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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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묵 처 죽산안씨효열비
양동묵(1880 - 1911)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896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한 전남 장성의병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그 뒤 1907년에는 양회일(梁會一)을 중심으로 편성된 전남 화순(和順)의 쌍산의진(雙山義陣)에 가담하였다. 능주(綾州)·화순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광주로 향하던 중 패산하고 말았다. 1910년 국치 소식을 듣고 울분이 쌓여 서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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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묵 추모비
양동묵(1880 - 1911)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896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한 전남 장성의병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그 뒤 1907년에는 양회일(梁會一)을 중심으로 편성된 전남 화순(和順)의 쌍산의진(雙山義陣)에 가담하였다. 능주(綾州)·화순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광주로 향하던 중 패산하고 말았다. 1910년 국치 소식을 듣고 울분이 쌓여 서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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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묘
양회일(1856 - 1908)은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아 오던 양회일은 1907년 군대해산의 충격과 이로 말미암은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양열묵(梁烈默)·이동화(李東華) 등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의하였다. 이들은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능주(綾州)읍을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여 총 5정을 빼앗았다. 그 여세를 몰아 광주(光州)를 치고자 계획하였다. 먼저 화순(和順)까지 진격하여 군아와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한 후 동복(同福) 방면으로 진격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이곳 화순과 동복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에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하고 외치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나주(羅州)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에 재차 의거하여 강진(康津)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왜병에게 체포되어 광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장흥(長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하여 단식 7일만에 마침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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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우 충헌비
구승우(1863 - 1917)는 1907년 3월 양회일(梁會一)을 주축으로 임노복(林魯福)·임상영(林相永)·정세현(鄭世鉉)·안찬재(安贊在) 등이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일대에 설치한 쌍산의소(雙山義所)에 참여하였다. 창의(倡義) 때 군량미 여러 석을 의진에 쾌척하였다고 하며, 병서를 깊이 읽었으므로 의진의 전략을 세우고 군사들의 전술훈련을 주관하였다고 전해진다. 주로 화순·능주·동복 일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교전을 벌였다. 1908년 양회일이 순국한 뒤에는 해남 산중으로 은신하여 수년간 훈장으로 생활하였다.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1917년 서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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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우 묘
구승우(1863 - 1917)는 1907년 3월 양회일(梁會一)을 주축으로 임노복(林魯福)·임상영(林相永)·정세현(鄭世鉉)·안찬재(安贊在) 등이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일대에 설치한 쌍산의소(雙山義所)에 참여하였다. 창의(倡義) 때 군량미 여러 석을 의진에 쾌척하였다고 하며, 병서를 깊이 읽었으므로 의진의 전략을 세우고 군사들의 전술훈련을 주관하였다고 전해진다. 주로 화순·능주·동복 일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교전을 벌였다. 1908년 양회일이 순국한 뒤에는 해남 산중으로 은신하여 수년간 훈장으로 생활하였다.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1917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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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영 의적비
임상영(미상 - 미상)은 의병에 참여하기 전에 중조산(中條山)에 은거해 있던 중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거의(擧義)를 결심하였다. 1907년 초 전남 화순에서 군량 수십 석과 의병 수십 명을 모집하여 양회일(梁會一)이 이끄는 쌍산의진(雙山義陣)에 참여하여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그 뒤 계당산(桂堂山)에 은거해 있던 1909년, 보성(寶城)의 일본헌병에게 구타당하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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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의소 의병발의지
이곳은 의병장 행사 양회일선생이 1906년 12월경에 당시 이집에 살고있던 임노복을 찾아봐 의병활동을 최초로 결의했던 곳이다. 이후 쌍산의소 의병은 화순군 일대에서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며 우리나라 의병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쌍산의소안 의병들이 1907년 3월부터 1909년까지 쌍산(계당산)자락과 증동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의로운 장소를 뜻하는데, 이러한 호국성지를 정화하는 것은 길이길이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위해서이다. 화순군에서는 2006년에 결의장소의 토지를 매입하고 결의장소인 민가를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