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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상, 김영하 충혼탑
김용상(1858 - 1919)은 1914년 서울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용상은 이낙정(李樂正) 등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9월부터 11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서울 종로 김태영(金泰榮) 집에서 유병하(柳秉夏)·성기섭(成基燮)·오덕영(吳悳泳) 등 수명에게 '국권회복의 기회가 성숙되었으니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결과 김용상은 유병하로부터 금 80원·성기섭으로부터 금 35원·오덕영으로부터 금 22원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다른 3명으로부터 금 백십 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모금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김용상은 1915년 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후 김용상은 고문의 여독으로 4년간 병석에 있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하(1878 - 1920)는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경 뜻을 같이하는 김교락(金敎洛)·양재홍(梁在鴻)·문재교(文在敎)·정동근(鄭東根)·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이후 이들은 나주(羅州)·함평(咸平)·화순·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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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기념비
정순호(鄭淳浩), 박춘근(朴春根), 김기칠(金其七), 이치홍(李治洪)은 1944년 6월 상순 일제의 패망과 조선 독립을 예견하고, "때가 오면 죽창을 들고 일본에 역습, 내란을 야기하여 일본을 패망시키고 조선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지역 주민에게 역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천황에 대한 불경죄와 육해군 형법, 보안법,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의 혐의로 1945년 3월 8일 광주 지법에서 정순호 징역 1년, 박춘근 징역 4월, 김기칠 징역 1년 6월, 이치홍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기념비가 있는 운주사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4~1945년 무렵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일제에 저항하고 싸웠던 독립지사들의 숨결이 면면히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순호와 박춘근은 도암면 용강리 출신이고, 김기칠은 순천시 송광면 출신의 승려로 운주사 주지였으며, 이치홍은 인근 나주시 다도면 방산리 닭금마을 출신이다. 정부는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여 정순호, 김기칠, 이치홍에게 각각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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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문 묘
한달문(1859 - 1895)의 휘는 영우, 자는 치화, 호는 묵헌이다.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한달문은 1859년(철종 기미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현 도암면 원천리 동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영민한 선생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였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무에를 연마하여 27세 되던 해인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의 무관으로서 최고위급 관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였다. 벼슬을 하던 차 당시 안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 관료들의 권력다툼으로 날이 새고 탐욕스런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밖으로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들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생은 사회개혁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추구하며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탐관오리처단과 반봉건 반외세투쟁으로 나가고 있던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장정들과 함께 1894년 9월 14일 전라북도 삼례 봉기에 참여하여 동학농민 혁명군 대장이 되었으며 그후 주로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서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선생을 비롯한 27명이 사로잡혀 강도수, 정사심, 이화삼 등 14명은 총살되었고 한달문, 주심언 등 13명은 나주에 주둔한 관군 진영에 압송되어 모진 문초를 받았다. 당시 관에서 절충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했던 선생이 농민군에 가담한 죄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선생이 겪은 갖은 악형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선생은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 등으로 장독에 의해 1895년 4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동두산에서 살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던 차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갑오년 납월(1894년 12월)에 선생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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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 집
송홍(1871 - 1949)은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민족 교육 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익중(翼仲), 호(號)는 운인(雲人).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 박씨이며 부인은 창령 조씨이다.한말의 애국 지사인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1904년 9월 그는 홍종영(洪鍾榮)·이범창(李範昌)·윤흥섭(尹興燮)·윤영섭(尹寧燮) 등과 일본의 토지 침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5년 5월 헌정 연구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 협회 광주 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17일 광주 공립 보통학교 전과(專科) 부훈도(副訓導)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1910~1923년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광주 공립 농업학교, 1924~1929년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때는 격문을 지어 배포하다 체포령이 내려졌다고도 한다. 평소 담당 과목인 한문과 함께 한국사와 한국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던 송홍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제1회 공판일인 1930년 2월 12일 한시를 남기고 사직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였으나 신병으로 8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47년 3월 22일에는 전남 문화 단체 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대통령표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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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 기념비
송홍(1871 - 1949)은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민족 교육 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익중(翼仲), 호(號)는 운인(雲人).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 박씨이며 부인은 창령 조씨이다.한말의 애국 지사인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1904년 9월 그는 홍종영(洪鍾榮)·이범창(李範昌)·윤흥섭(尹興燮)·윤영섭(尹寧燮) 등과 일본의 토지 침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5년 5월 헌정 연구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 협회 광주 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17일 광주 공립 보통학교 전과(專科) 부훈도(副訓導)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1910~1923년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광주 공립 농업학교, 1924~1929년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때는 격문을 지어 배포하다 체포령이 내려졌다고도 한다. 평소 담당 과목인 한문과 함께 한국사와 한국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던 송홍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제1회 공판일인 1930년 2월 12일 한시를 남기고 사직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였으나 신병으로 8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47년 3월 22일에는 전남 문화 단체 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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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회 유적비
이관회(1871 - 1910)는 대한제국기 안규홍의병부대에 선봉장으로 활동한 의병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에 농민의 신분으로 보성에서 농민군이 주축이 된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었다.1908년 의병을 토벌하려는 일본군을 유인, 파청대첩(巴靑大捷)을 거두었다. 그해 8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진산전투를 전개하였고, 그달 24일 원봉(員峰)기병주둔소를 야습하여 5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물자와 화약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차차 전세가 기울어 1909년 7월 의병부대가 일단 해산하자 고향에 돌아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피살되었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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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회 유적비
이관회(1871 - 1910)는 대한제국기 안규홍의병부대에 선봉장으로 활동한 의병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에 농민의 신분으로 보성에서 농민군이 주축이 된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었다.1908년 의병을 토벌하려는 일본군을 유인, 파청대첩(巴靑大捷)을 거두었다. 그해 8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진산전투를 전개하였고, 그달 24일 원봉(員峰)기병주둔소를 야습하여 5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물자와 화약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차차 전세가 기울어 1909년 7월 의병부대가 일단 해산하자 고향에 돌아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피살되었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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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귀주 기적비
홍귀주(1906 - 미상)는 전남 화순(和順) 사람이다.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1929년 3월에 형식상 해체된 후에도 중동학생들의 활동은 각 학교단위로 계속되어졌다.이때 광주사범에 재학중이던 그는 1929년 3월, 선배회원인 임종근(林鍾根)·김기주(金基柱) 등의 졸업에 즈음하여 동교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모여 졸업 후 항일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단결을 다짐하였다.한편, 광주학생은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동년 6월에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는데 동본부는 조직적 활동을 위해 하부조직으로서 각 학교 단위로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그러한 계획에 따라 그는 동년 7월에 강달모(姜達模)·송동식(宋東植) 등 광주사범학교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뒷산에 모여 독서회조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동년 9월, 광주형무소 뒷산에 다시 모여 광주사범독서회를 결성하였다.동회는 전회원을 5개반으로 나누고 각반별로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시위 후 독서회운동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혔으며 이로 인하여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겪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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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봉 기적비
정태봉(1893 - 1942)은 일제강점기 신간회 대구지회 총무간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군자금 모집 요청서를 받자, 대구에 사는 동지 김두환(金斗煥) 등 10여 명과 연합해 경상도 일대의 부호 명단을 작성하고 금품을 모았다.같은 해 11월 25일부터 1921년 2월 20일까지 3개월간 6만 8000원(圓)을 임시정부의 무기 구입 자금 목표액으로 결정한 뒤, 각 동지에게 200여 원의 책임모집 액수를 배당하였다.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정부를 창립한 총재 정갑룡(鄭甲龍), 부총재 정을룡(鄭乙龍) 명의의 취지문 수십 통을 작성, 배포하였다.군자금 모집 활동중 대구에서 붙잡혀 5년을 선고받고 항고, 1921년 10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하였다. 1928년 6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일당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의 서무와 총무간사로서 대구시 달성공원(達城公園) 뒷산 송림에서 동지 6명과 유사시 거사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 극당(極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그들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동삼성에서 농경지를 구입한 뒤 농민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면서 청년들을 모아 유사시 활용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이에 필요한 군자금은 동지 노차용(盧且用)으로 하여금 모금하도록 하였다. 1928년 5월 11일 대구 시내 총포점에서 신호용 권총을 구입, 소지하고 대구 시내에 거주하는 김교성(金敎成)을 방문해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즉각 거절당하여 협박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공갈,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5년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어 복역하였다. 1942년 칙령 제10호에 의거, 징역 2년 7월 11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순국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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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면 독립운동 충혼탑
1919년 3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화순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능주 장터에서 첫 만세 시위가 일어난 뒤 3월 15일에 화순읍 남쪽의 갱무산 정상에서 두 번째 만세 시위가 있었다. 동복천변 시장독립 만세 운동은 세 번째 발생한 시위로 동복 보통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장터에 있던 성인들이 참여했다. 동복 보통 학교는 일찍이 대한 제국 시절인 1908년에 동복 동진 학교로 시작되었으나, 1909년에 공립 학교로 전환했다. 설립 때부터 옛 동복현의 유력한 성씨인 동복 오씨들이 참여했고 학생들도 상당수 동복 오씨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만세 운동을 준비한 학생들도 다수가 동복 오씨였다. 당시 16세였던 오재인을 비롯하여 17세인 오덕기, 16세인 오재효, 14세인 정창문, 13세인 오연복 등이 참여하였다. 오재인·오덕기·오재효·정창문·오연복 등은 3월 13일 능주 장터의 만세 시위 등 화순 지역의 만세 운동 동향과 이웃한 광주의 만세 시위 등을 소문을 통해 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학교 뒤에서 모임을 갖고 3월 20일을 시위 결행의 날로 정했다. 3월 20일 오전에 교문을 나선 학생들은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의 장터로 나갔다. 때마침 장터에는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백립(白笠)을 쓰고 흰 도포 차림을 한 노인들이 있는데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고창하자 노인들도 이에 동참했고 장터 일원의 몇몇 아낙네들도 여기에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참가자는 대략 수 십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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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중 묘
이원중(1877 - 1917)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이다. 1907년 8월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전남 담양(潭陽)·곡성(谷城)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동복(同福) 일경주재소를 습격할 때 군량 등을 운반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08년 9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이어 11월 7일 대구공소원에서 유형(流刑) 5년을 선고받아 유배생활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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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중 항일사적비
이원중(1877 - 1917)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이다. 1907년 8월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전남 담양(潭陽)·곡성(谷城)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동복(同福) 일경주재소를 습격할 때 군량 등을 운반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08년 9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이어 11월 7일 대구공소원에서 유형(流刑) 5년을 선고받아 유배생활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