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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3.1운동기념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산 10번지에 위치한 현충시설로서 일제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당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4일 26인의 강진 지방 의사와 수천 군중이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던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1976년 5월 9일 화응석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이기성, 김후식, 김학수, 김윤식 등 26인의 의사는 실형을 언도 받았다. 강진군에서는 매년 3월 1일 군내 각급 기관 및 단체장, 그리고 다수의 군민들이 이곳에 모여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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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좌상
김영랑(金永郞)은 1902년 음력 12월 18일,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면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김현상, 김성수와 함께 3.1운동을 준비했지만, 다음날 강진 경찰서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는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에도 검찰에서 상고를 제기하자,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 후 1930년대에는 「독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의 다수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표출하였습니다. 2018년 정부는 김영랑을 건국포장으로 추모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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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 비
김한섭(1838-1894)은 조선후기 『통화변답』, 『농정신서서조변』, 『오남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로 본관은 영광(靈光), 호는 오남(吾南)이다. 오남 김한섭은 본래 장흥 흥룡동(현재 부산면 내안리) 출신으로 1877년에 금릉 월각산 밑 대명동(현 강진 성전면 송월리)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진 보암면(현 도암면)에 거주하던 김한섭 도통장은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반대하였다. 도통장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의병장처럼 지역책임자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김한섭은 ‘경시적도문(적도에게 경고하며 내보이는 글)’이라는 글을 보내 동학의 궐기를 반대하였으며 제자 수십명을 모아 강진 읍성 서문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동학농민군 대장이었던 이방언과는 고산 임헌회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김한섭은 스승인 임헌의의 『고산문집(鼓山文集)』 간행에 힘썼던 성리학자로 명덕은 이(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이와 기의 합이며, 심은 몸의 주재자라는 견해를 주장한 저서가 그의 『오남문집(吾南文集)』이다. 이 책은 현재 도난우려 등으로 방촌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해오고 있다. 오남 김한섭 도통장의 죽음 후 그의 강학을 들었던 제자들과 유림, 그리고 후손들이 부산면 내안리 뒷산에 흥룡단이란 단향을 조성하였으나 직계후손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중단됐다. 한편 제자들이 뜻을 모아 비석을 세운 것이 지금 강진 신전면사무소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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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항일 애국지사 추모탑
항일 애국지사 추모탑은 1984년 10월 20일 고흥읍 봉황산 기슭아래 항일 애국지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탑문(塔文)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2014년 순천 보훈지청 후원으로 다시 각인에 채색 및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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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현충공원
고흥군 현충공원은 2017년에 새로 조성된 공원이다. 1965년 봉황산에 건립된 구 충혼탑이 낡고 시설이 불편하다는 보훈가족의 요청사항에 따라 2015년부터 조성 공사를 벌여 2017년 개장하였다. 고흥종합문화회관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 1만5162m²에 현충탑, 임진왜란충혼탑, 항일애국지사추모탑, 참전기념탑 등 4개 탑이 건립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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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 묘
관동지방에서 활약한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 이병채(1875-1940)의 묘이다. 이병채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철원, 연천, 포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정을 거듭하여 위명을 떨쳤으며 1919년 3.1운동 참가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혁명사관학교 설치에 가담하고 고려광복회 참모관을 역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0년 미상일에 만주에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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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 순의비
이병채(1875-1940)는 명성황후시해 사건과 단발령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흥양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허위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 경기도 지방에서 일어난 의진을 따라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관동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이병채는 최중봉, 성익현, 민동식, 한중보, 이호성, 차윤옥, 권대형 등과 함께 관동구군도창의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원산항 진격 작전을 전개하였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경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에서 용맹을 떨칠 수 있었으며 관동 지역의 사림들과 민중들에게 각종의 포유문을 발표하여 지속적인 의병투쟁과 그 지원을 촉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병채는 자진 해산하였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로 일어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3년 4월 연해주에서 독립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 노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부에서는 이병채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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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사적비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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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묘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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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추모비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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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충훈비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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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 기적비
이병채는 명성황후시해 사건과 단발령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흥양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허위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 경기도 지방에서 일어난 의진을 따라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관동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이병채는 최중봉, 성익현, 민동식, 한중보, 이호성, 차윤옥, 권대형 등과 함께 관동구군도창의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원산항 진격 작전을 전개하였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경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에서 용맹을 떨칠 수 있었으며 관동 지역의 사림들과 민중들에게 각종의 포유문을 발표하여 지속적인 의병투쟁과 그 지원을 촉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병채는 자진 해산하였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로 일어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3년 4월 연해주에서 독립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 노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부에서는 이병채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