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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0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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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덕 집
안후덕(1905 - 194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회 상해지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2월 사재를 정리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28년 2월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 자기 소유 토지를 저당잡히고 4만 5000원(圓)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그 금액 중 2만 2000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나머지 2만원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에 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이 청년회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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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기념탑(낙영재)
낙영재는 석천 김중수 선생의 한문서당으로 문하생 김기택 등 16명이 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였던 곳으로 1943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주민들의 자력으로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반일 거점지역이라 하여 일본 경찰의 방해로 복구하지 못하다가 1989년 4월 8일 4.8 독립운동만세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고 2005년 4월 7일 낙영재 복원사업을 완공하였다. 기미 3.1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 낙영재의 유생들도 3.1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김기택 공을 비롯한 유생 24인이 모의하고 군중동원에 총력을 다하여 1919년 4월 8일 문장에서 거사하니 참여한 인원이 2천을 넘었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일경들도 간담이 서늘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일헌병 및 일경에게 굽히지 않고 싸웠으니 이 운동이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빛난 항일운동인 4.8 문장만세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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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3.1만세운동 시발지비
문장 3.1만세운동 시발지비는 1989년 4월 8일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 135번지에 3.1만세 기념탑을 건립하면서 동 발생지인 이곳에 세운 비이다. 함평 문장 4・8독립만세운동은 지난 1919년 4월 8일 문장 장날을 기해 지역의 애국지사 24명이 주도해 만세운동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른 사건으로 훗날 많은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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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감 기념비
정진감(1921 - 2008)은 1940년 9월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 또는 잡역 등에 종사하는 한편, 대판청년회(大阪靑年會) 예비교(豫備敎) 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1941년 4월에는 대판야간중학교(大阪夜間中學校) 이부(二部)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일본에 건너온 이후 일인의 재일한인에 대한 극심한 민족차별과 비참한 생활상을 목도하면서 한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오직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일제의 도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1942년 5월 9일에 우리 민족청년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이를 계기로 5월 중순경 동급생인 윤병윤(尹炳允)·고방웅(高房雄)·이형휘(李炯徽)·김규장(金圭藏)·하백문(河白文) 등과 비밀리에 회동, 한국독립청년당(韓國獨立靑年黨)을 결성하고 40여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동지규합과 정신계도에 진력하던 중, 1943년 3월 2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44년 1월 26일 대판지방재판소(大阪地方裁判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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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충혼비
김태원(1870 - 1908)의 자는 태원, 호는 죽봉, 이칭은 김준, 김참봉이며, 대한제국기 전남 장성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김태원은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김태원은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김태원은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김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때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소(호남의소)라고 부대이름을 바꾸어 일진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을 처단하였으며,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다. 1908년 5월 장성(長城)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으며 광주 어등산(魚登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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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기적비
박영근(1885 - 1910)은 대한제국기 전남 함평의 전수용 의병진에서 호군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1908년 4월 10일 함평군 용진산(龍珍山)에서 조경환(曺京煥)의 의병진에 가담하여 그 달 13일까지 함평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전수용(全垂鏞)이 의병진을 편성하자 1908년 8월 23일 그 휘하에 들어가 호군장(護軍將)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5월까지 전라남도의 함평·광주·장성·영광·나주·담양, 그리고 전라북도 순창 등지에서 일본의 수비대·헌병대 및 경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전수용이 잠시 의병진을 해산하고 귀향하게 되자, 그 해 5월 28일 그뒤를 이어 흩어진 의병 3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재편성하여 그해 7월 17일경까지 영광·장성·광주·나주, 그리고 전라북도 무장(茂長)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그러다가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 때 잡혀 옥고를 치른 끝에 죽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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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군 기미3.1의거열사 기념비
함평군 기미3.1의거열사 기념비는 1920년 3월 26일 이 곳 함평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건립한 비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함평에서도 4월 26일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를 경험삼아 1920년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되자 조사현, 송태호, 정기연 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6일 함평공립보통학교 졸업식 날을 기해 보통학교 생도들과 청년, 군민들 수 백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10여명의 군중이 부상을 입었으며, 주동자 2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전 군(郡)으로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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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집강소
장백림은 1150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1170년에 고려무신정변 후에도 우참찬(부총리)을 역임하다 40년간 관직을 끝으로 1190년 무신정권에 의해 진도로 유배되었다. 장백림(6세)께서는 양림에 정착하여 참찬공파 파조가 되었고, 후학들도 양성하였다. 6세 百林(백림)의 원모사에 이은 21세 宇翰(우한)의 충효사, 23세 南驥(남기)의 양림사는 모두 흥선대원군이 서울 철폐할 때 훼털되었고, 여기 24세 두갑의 경모재만 사우로 지었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함평읍내에서 집강소를 짓기로 하고 1894 6월경 임시로 여기 경모재에 함평집강소를 설치했는데 그해 연말 동학농민혁명이 유혈진압되면서 집강소도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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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광 추념비
장경광(1866 - 1922)의 본명은 상호, 호는 경암이다. 1894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여,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했는데, 조일연합군이 무력 진압했다. 장경광은 1866병인년 부 鉉默 모 成岩(한양조씨)의 독자로 태어났고, 장군의 유년시절, 병인.신미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년 함평 주포 놀이터에 척화비를 세워 반외세 사상을 선무했는데, 조부(志衡, 28세)는 당시 한성부 좌윤(서울부시장)에 재임했다. 장경광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했고, 그해 9월 ,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다가 그해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 때 현상 수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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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3.1 만세탑
문장3.1의거탑은 순절하신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승시키고자 세운 탑이다. 1919년 4월 8일은 폭압적 일제 무단정치에 목숨걸고 저항하고자 최초의 지역 유림의 높은 양심이 솟구친 날이다. 문장장터 4.8 만세운동은, 독립 쟁취라는 민족의 염원을 달성키 위해서다. 그때 낙영재에서 태극기 1,600개와 격문을 제작한 사전결의의 숭고한 얼과 넋을 영원히 기리고자 조형되었다. 기미년 4월 8일 오후 2시 문장장터에서 애국지사 24인이 선봉에 서서 나라사랑, 자주독립 높은 뜻을 일깨우고, 수백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독립쟁취 저항운동으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만세소리 진동했다. 문장은 1919년 4월 8일 장날을 택하여 이인행 외 23명의 열사 주도하에 이기환 김재순 이돈동 등 수 많은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하늘 높이 외치며 왜놈의 헌병과 맨 주먹으로 싸워 선혈을 흘린 독립무장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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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4.8만세운동기념관
기미4.8만세운동기념관은 1919년 4월 8일 문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이다. 거사 전 날 밤인 4월 7일에는 마을사람 십수명이 태극기를 더 만들어 밤늦게 문장시장 근처 요소요소에 운반하여 숨기는 등 거사를 위한 면밀 주도한 일이 벌어진다. 4월 8일 아침에는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거리 거리에 배치되어 민중들에게 취지를 알리고 태극기와 죽창을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시장에 모이도록 하였다. 김기택, 정재남, 이윤상, 장효섭, 정용섭등이 시장에 나온 대중을 선동하니 일제히 봉기 독립만세 소리가 시장에 메아리 치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이어 일본 경찰 문장주재소와 병참소를 기습 습격하고 일진은 함평 쪽으로 일진은 영광쪼그로 일진은 송정리쪽으로 행진했다. 영광.함평.장성.나주에서 지원 온 일본경찰대와 헌병이 총검으로 대오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며 구밀교 공사를 하던 일본인 잡역부 10여 명이 쇠망치를 휘두르며 대오에 뛰에들어 거리는 곳곳에서 피로 물들게 하였다. 한편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김기택이 헌병들에게 구타 검속되어 가자 이윤상, 장효섭등이 경찰 주재소 앞에서 애국청년 석방하기를 요구했으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왜놈들은 오히려 폭력을 행사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만세운동은 계속되었고 끝내 총검 앞에 해산되었는데 죽창을 든 일부 청년들이 일경과 대치하며 많은 피해 사례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때 주모자 20명이 당일 검속되고 그중에서 김기택(징역1년), 이윤상(징역6월), 장효섭(징역8월), 정재남(징역6월), 정용섭(징역8월)은 실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15명은 불기소 처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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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산 묘
이강산(1874 - 1910)은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함평, 영광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9년 7월에 전라남도 함평 대야명에서 동지 박치일(朴致一)·정인술(鄭寅述)·박장봉(朴章奉)·서성학(徐成學)·양창국(梁昌國)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金泰元, 일명 準)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의병장 김태원이 순국한 뒤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1909년 함평·영광 각 지역에서 접전한 뒤 나주의 헌병분파소 및 구례의 파견대 소속 밀정인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朴福男) 등을 살해하였으나 이 일이 발각되어 붙잡혔다.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항소하였으나 이듬해인 1910년 3월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기각되어 원심이 확정되었고, 같은 해 6월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