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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집
기우만(1846 - 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고종 32)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고종 33)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 봉기의 기운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1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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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기산도 집
기삼연(1851 - 1908)은 개항기 때, 호남 창의회맹소의 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 · 부안 · 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 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 · 이석용(李錫庸) · 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산도(1878 - 1928)는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에 의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던 의병이다. 일찍이 기독교계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의 식민지화의 주구(走狗)를 살해하여 식민지화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박종섭(朴宗燮) · 박경하(朴敬夏) · 안한주(安漢周) · 이종대(李鍾大) 등과 저격무기를 구입한 뒤, 손성원(孫聖元) · 박용종(朴鎔鍾) · 김필현(金弼鉉) · 이태화(李太華) 등을 파견,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가 결사대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습격하여 박종섭 · 박경하 · 안한주 · 이종대와 함께 붙잡혔다. 출옥한 뒤 부상한 다리를 이끌고 일생을 유랑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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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묘
기삼연(1851 - 1908)은 개항기 때, 호남 창의회맹소의 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 · 부안 · 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 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 · 이석용(李錫庸) · 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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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황룡전적지 기념탑
장성 황룡 전적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대한제국기 동학농민군 관련 전적지이다. 반봉건의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반외세의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29일 백산 봉기 이후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해 관속을 응징하였다. 4월 6일∼7일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철저히 참패시킴으로써 불과 한 달 만에 호남일대를 휩쓸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에게 군사 800명을 파견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영광에 머물고 있는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함평에서 나주·장성 등지로 향했다는 함평현감 권풍식의 보고에 따라 4월 22일 이학승·원세록·오건영에 병정 300명을 주어 장성으로 출발시켰다. 이튿날 23일(양 5월 27일)에는 황룡촌에 유진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때마침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관군으로부터 기습적인 포격을 받아 40∼50명이 희생되면서 진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망을 보고 있던 농민군은 경군의 숫자가 농민군에 비해 열세임을 확인하고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역습을 가하였다. 양쪽 진영의 거리가 가까워 포격전이 불리한 여건인데다 죽음을 각오하고 육박해오는 동학농민군의 돌격에 신식훈련을 받았다는 경군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계훈의 경군은 신식훈련을 받은 병정들이요, 또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이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오는 동학농민군에게 쫓겨 영광방면으로 도망하다가 5리쯤 나가서 신호리 마을 뒤 구릉에 이르렀다. 이때 대관 이학승은 후미에서 동학군과 최후로 항전했으나 전사하고 중요한 무기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경군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고 병정은 사기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관군을 30리 지경까지 추격해 ‘구르프포’ 1문과 ‘회선포’ 1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또 대관 이학승 이외에 병정 5명이 전사하였다. 동학군은 진중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竹)로 만든 ‘장태’ 수십 대를 산의 정상으로부터 내려 굴리며 사격을 가함으로 관군은 미처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시살(廝殺)을 당해 이효승·배윤환 2명과 관병 100명을 몰사시키고 대포 2문, ‘구르프포’·‘회선기관포’ 각 1문과 양총(洋銃) 100여 개를 빼앗았다. 동학농민군들은 이 장성싸움에서 얻은 대포와 양총을 거두고 북상해 정읍·태인을 거쳐 이 전투 이후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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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룡 묘도비
위계룡(1921 - 2002)은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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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헌고택(위계룡 가옥)
위계룡(1921 - 2002)은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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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석규 의열비
위석규(1878 - 1913)는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7년 청국(淸國) 원세개(袁世凱)의 구원을 얻어 일본을 타도하려고 하였으나, 그 국력이 일본을 구축하는 데에는 미약함을 느끼고,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를 거점으로 박태문(朴泰文)·강명운(姜明雲)·국사성(鞠思成)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3년 4월 이역에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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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 재실(화수정)
화수정은 1860년 부산면 내동마을에 건립되었다. 1901년에 이곳에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과 오남(五南) 김한섭(金漢燮) 배향하는 흥룡단(興龍壇)을 만들었다. 김한섭(1838 - 1894)은 조선후기 『통화변답』, 『농정신서서조변』, 『오남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학문이 성취된 뒤엔 고향인 장흥(長興)과 금릉(金陵, 강진 별호)의 대명동(大明洞)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1877년에 강진군 월각산(月角山) 밑 대명동으로 이주했으며, 1882년에 그의 둘째 아들 김봉식(金鳳植)을 지도(智島)로 보내어 김평묵(金平默)을 찾아가 공부하게 하였다. 또 1883년엔 그의 스승 임헌회의 문집인 『고산문집(鼓山文集)』 간행을 위하여 오랫동안 고창(高敞)에 있었다. 「삼극도설(三極圖說)」·「유석심학부동변(儒釋心學不同辨)」·「일감문답(一鑑問答)」 등 성리학적 논저와 「벽사설(闢邪說)」·「통화변답(通貨辨答)」·「농정신서서조변(農政新書序條辨)」 등 정치적 견해를 담은 논문도 있다. 대체로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성즉리심즉기설(性卽理心卽氣說)·성위심재설(性爲心宰說) 등을 반대하고 명덕은 이(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이와 기의 합이며, 심은 몸의 주재자라는 견해를 주장한 것이 그의 성리학적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오남문집(吾南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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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 유허비
김한섭(1838 - 1894)은 화서 이항로를 거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 배웠으며, 호는 오남(吾南)이었다. 장흥의 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838년 장흥 흥룡동(현 부산면 내안리)에서 출생한 오남 김한섭(吾南 金漢燮)은 1877년에 금릉 대명동(大明洞: 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대월마을)으로 이사하여 서재를 짓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7년부터는 보암면 수양리(현 신전면 수양리)로 옮겨 강학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2년 12월에 강진향교 장의(掌議)에 임명되고, 1894년에는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절교한다는 글을 다시 보냈다고 한다. 또한 4월부터는 동학 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박기현(朴冀鉉), 김병휘(金柄輝) 등과 향약계를 조직하고 동학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사람들을 효유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진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자 그 수장이 되어 민보군을 이끌었으며, 1894년 12월 7일 장흥과 강진, 북쪽에서 후퇴해온 농민군이 합공한 강진성 전투 당시 강진 수성군의 민보군 지휘자로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오하기문에는 “의병장 김한섭이 전사했으며 그 제자인 김형선(金亨善)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김용현(金龍鉉), 좌수 윤종남(尹鍾南), 현리 김봉헌(金鳳憲), 황종헌(黃鍾憲)도 같이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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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 묘
김한섭(1838 - 1894)은 화서 이항로를 거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 배웠으며, 호는 오남(吾南)이었다. 장흥의 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838년 장흥 흥룡동(현 부산면 내안리)에서 출생한 오남 김한섭(吾南 金漢燮)은 1877년에 금릉 대명동(大明洞: 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대월마을)으로 이사하여 서재를 짓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7년부터는 보암면 수양리(현 신전면 수양리)로 옮겨 강학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2년 12월에 강진향교 장의(掌議)에 임명되고, 1894년에는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절교한다는 글을 다시 보냈다고 한다. 또한 4월부터는 동학 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박기현(朴冀鉉), 김병휘(金柄輝) 등과 향약계를 조직하고 동학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사람들을 효유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진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자 그 수장이 되어 민보군을 이끌었으며, 1894년 12월 7일 장흥과 강진, 북쪽에서 후퇴해온 농민군이 합공한 강진성 전투 당시 강진 수성군의 민보군 지휘자로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오하기문에는 “의병장 김한섭이 전사했으며 그 제자인 김형선(金亨善)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김용현(金龍鉉), 좌수 윤종남(尹鍾南), 현리 김봉헌(金鳳憲), 황종헌(黃鍾憲)도 같이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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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환 공덕비
김두환(1909 - 1956)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그는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전남 해남(海南)의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의 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비밀결사였다. 동회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김두환은 유재성(劉載星)·정진수(丁瑨壽) 등 10여명의 동지와 함께 장흥군의 각 부락을 분담하여 동지규합과 조직확대에 힘썼다. 그는 1933년 12월 초순 동군 안양면(安良面) 지천리(芷川里)에서 김진기(金珍琪)와 함께 세포반(細胞班)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34년 2월 중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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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사
해동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1955년 당시 장흥 죽산 안씨 문중은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사당을 짓고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장흥군은 ‘안중근 의사 역사문화자원 개발사업’을 통해 해동사 일대를 추모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7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에 애국탐방로 등의 기반시설 조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