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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순지비
임병찬(1851~1916) 의병장은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이다. 39살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義兵將)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招募), 군량(軍糧)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洪州)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陣容)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監禁)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제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巨文島)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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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여수시가 일제강점기에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순국한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 40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3월 1일, 여수 웅천 하나로공원에 건립하였다. '불멸의 비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념탑은 높이 17m 규모로 승리(Victory)의 영문 V자와 3.1독립운동의 '만세', 여수반도 지형의 '나비'를 상징하는 세 가지 형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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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연준 부부 묘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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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연준 목사상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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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 묘
윤형숙(1900~1950)은 전남 광주 사람이다. 1919년 3월 6일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서정희(徐廷禧) 등은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 및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전남 광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 반경, 주도자들은 계획에 따라 광주교(光州橋) 밑 천변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천변을 따라 시장으로 진출하여 시위대를 형성하여 행진하였다.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던 윤형숙도 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헌병들은 실탄사격을 감행하며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은 선두에 있던 윤형숙의 왼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팔이 잘린 윤형숙은 잠시 땅에 쓰려졌다가 일어나 오른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불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들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윤형숙은 중상을 당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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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우 묘
이선우(1899~1961)는 전남 여수 사람이다. 전남 여수군(麗水郡) 여수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9월 여수로 귀향한 유봉목(兪鳳穆)은 이선우를 만나 청년회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이선우, 유봉목 등은 12월 여수 간이수산학교(簡易水産學校) 기숙사에서 수산학교 학생 김동렬(金東烈) 등 5명을 만나 이들과 함께 여수보통학교와 수산학교 재학생, 졸업생 중 적임자를 뽑아 위친계를 조직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12월 18일 종포(鍾浦) 박종종(朴宗鍾)의 집에서 하재학(河在學) 등 40여 명을 규합한 이선우 등은 여수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2월 21일 여수 장날에 오전 10시를 기하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이선우 등은 읍내 덕충리(德忠里) 김여진(金汝珍)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19일 계획이 발각되어 이선우 등 3명이 붙잡히고 태극기 120장을 압수당하였다. 이로 인해 이선우는 192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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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극 구 묘
이대극(1875~1909)은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영광읍민의 추대로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활약함으로써 군사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참봉(參奉)으로 임명되었으나 국운이 기울어짐을 개탄하여 귀향하였다. 그 뒤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1906년 봄 영광에서 거의(擧義)하여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듬해 여름 기삼연(奇參衍)이 장성(長城)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9월에 수백 명의 군사와 다수의 군비를 가지고 고창(高敞) 문수사(文殊寺)에 유진하고 있던 기삼연을 찾아가 의진을 통합한 뒤 기삼연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그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 겸 군기감(軍器監)이 되었으며,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격문을 보내어 거의명분을 천명하였다. 같은 해(1907) 10월에는 일군이 야음(夜陰)을 틈타 은밀히 의병진을 포위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군사를 좌우로 분산시켜 협공케 하여 일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법성포(法聖浦)·무장(茂長)·고창·영광 등지를 전전하며 연전연승을 거두고 일인 추방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장성에서 회군하고 말았다. 동년 10월 11일 기삼연과 함께 무장 고산(高山)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을 유인, 공격해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불갑산(佛甲山) 연실봉(蓮實峰)에서 진을 구축하고 일군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계속되는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11월에는 장사산(長沙山)으로 후퇴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뒤 일군은 현상금을 걸고 그를 체포코자 하였는데, 1909년 4월 3일 잠든 사이에 현상금을 노린 배반자에 의해 참살됨으로써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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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묘
김용구(1861~1918)는 전남 영광 사람이다. 호는 후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봄부터 기삼연(奇參衍)과 내왕하며,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동지를 모아 일심계(一心契)를 맺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논의하였다.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00명이 모여들었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 명을 포살하였다. 그리고 9월 24일 장성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 선운사(禪雲寺)에서 머무를 때 외아들 김기봉(金起鳳)이 합류하였는데, 13일 흥덕 안치(安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김기봉이 전사하였다. 28일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았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환이 부족하여 다내동으로 철수하였다. 2월 19일 고창 읍내로 들어가 세무 주사 서상달(徐相達)을 사살하였으며,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3월 8일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보병 등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23일 대덕리에서, 4월 11일에는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하였으며, 17일 무장 와공면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하여, 18일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 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3∼4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 뒤 1911년 봄 이후로 금산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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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묘
김기봉(1886~1907)은 전남 장성(長城) 출신으로서 김용구(金容球)의 아들이다. 정미7조약 체결 후 군대해산이 단행되자 김기봉은 부친과 함께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회합에 참여하였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을미의병 때에 기우만(奇宇萬)의 광산회맹소(光山會盟所)의 의병운동에 기삼연과 함께 장성의진을 거느리고 참여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친은 기삼연 의진의 통령(統領)이 되어 무장(茂長) 법성포(法聖浦) 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김기봉은 그의 부친을 따라 작전을 수행해 오다가 1907년 12월 10일 흥덕 안치(興德鞍峙) 전투에서 부친을 도와 적을 대파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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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충절비
김용구(1861~1918)는 전남 영광 사람이다. 호는 후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봄부터 기삼연(奇參衍)과 내왕하며,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동지를 모아 일심계(一心契)를 맺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논의하였다.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00명이 모여들었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 명을 포살하였다. 그리고 9월 24일 장성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 선운사(禪雲寺)에서 머무를 때 외아들 김기봉(金起鳳)이 합류하였는데, 13일 흥덕 안치(安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김기봉이 전사하였다. 28일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았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환이 부족하여 다내동으로 철수하였다. 2월 19일 고창 읍내로 들어가 세무 주사 서상달(徐相達)을 사살하였으며,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3월 8일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보병 등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23일 대덕리에서, 4월 11일에는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하였으며, 17일 무장 와공면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하여, 18일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 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3∼4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 뒤 1911년 봄 이후로 금산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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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충절비
김기봉(1886~1907)은 전남 장성(長城) 출신으로서 김용구(金容球)의 아들이다. 정미7조약 체결 후 군대해산이 단행되자 김기봉은 부친과 함께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회합에 참여하였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을미의병 때에 기우만(奇宇萬)의 광산회맹소(光山會盟所)의 의병운동에 기삼연과 함께 장성의진을 거느리고 참여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친은 기삼연 의진의 통령(統領)이 되어 무장(茂長) 법성포(法聖浦) 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김기봉은 그의 부친을 따라 작전을 수행해 오다가 1907년 12월 10일 흥덕 안치(興德鞍峙) 전투에서 부친을 도와 적을 대파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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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기념비
김철(1886~1934)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교통부차장, 교통부총장대리, 군무장, 재무장, 무임소장, 국무원 비서장 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살 의거를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1934년 중국 항주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