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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집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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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선근공원(안규홍 사적지)
선근공원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728-5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장소에는 1919년 벌교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하는 의향 의자, 주먹의자 등 관련된 미술작품 12종 34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낙안군 출신으로 머슴살이하던 안규홍이 조선인 아낙을 희롱하던 일본 헌병을 진압하였던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동상 등이 있다. 안규홍(1879~1910)은 의병장이 되어 26차례나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으며 이후 심남일, 전해산과 연합하여 합동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의병에 대한 보복으로 낙안군을 폐지했고 남한 대토벌작전을 자행했다. 안규홍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안규홍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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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집
나철(1863~1916)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권지부정자로 활동하다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인물이다. 1905년 일본에 건너가 동지들과 함께 정계요인을 역방하며 동양평화를 주장하고, 귀국 후에도 반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대신 이지용을 처단하려고 폭발장치를 보내는 등 강력한 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이후에도 다른 을사오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건 전모가 폭로되면서 유배형을 받게 되었으나 즉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 단군성도를 숭상하며 항일투쟁에 전념하던 중, 민족갱생의 도를 단군교로 창교하여 활동했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학교 설립과 교육사업을 추진하며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했으며, 귀국하여 일제와 일본 의회에 견책의 장서를 보낸 뒤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국가와 교를 위해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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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기념관
나철(1863~1916)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권지부정자로 활동하다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인물이다. 1905년 일본에 건너가 동지들과 함께 정계요인을 역방하며 동양평화를 주장하고, 귀국 후에도 반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대신 이지용을 처단하려고 폭발장치를 보내는 등 강력한 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이후에도 다른 을사오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건 전모가 폭로되면서 유배형을 받게 되었으나 즉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 단군성도를 숭상하며 항일투쟁에 전념하던 중, 민족갱생의 도를 단군교로 창교하여 활동했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학교 설립과 교육사업을 추진하며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했으며, 귀국하여 일제와 일본 의회에 견책의 장서를 보낸 뒤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국가와 교를 위해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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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항일사적비
1921년 8월 추기 석전대제 시, 일제가 제주를 밀주로 봉인하자 보성유림이 일제에 항거한 투쟁사를 기록한 비다. 여기서 가리키는 보성향교 제주조난사건은 1921년 8월, 문묘대제에 헌작하기 위해 빚어놓은 신성한 제주를 주세령 위반인 불법밀조주라는 명분으로 일본 재무주임이 봉인 압수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투철한 항일 운동을 통해 마침내 전국 향교에서는 관례대로 제주를 빚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34. 6. 22. 주세령이 개정되는 등 보성향교의 창의 정신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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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 추모비
성재 이윤선(1862~1909) 선생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3년 9월에 건립한 추모비이다. 전남 보성(城) 사람으로 육군참위학교(陸軍參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7년 3월 9일 양회일(梁一), 안찬재(贊) 등과 함께 거의를 하였으며 능주에서 창기하여 동복 지역으로 진출하며 활동을 본격화하던 중 피체되어 유형 (流刑) 10년을 받고 전남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방면되었다. 이에 다시 재기를 도모하고 전남 능주를 본소(本所)로 하여, 잠적했던 의사와 사졸들을 규합, 대오(隊伍)를 정비하고 군사훈련으로 군기를 다진 뒤 1908년 1월 21일 발대, 진군하였다. 이어서 심남일(沈南). 임창모(林昌模) 등과 함께 호남창의소(湖南義所)를 결성하고 도대장(都大將)에 추대되어 보성(城)의 안계(安桂洪)의진과 연합하여 장흥(長興). 보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광주(光州)로 향하여 진군 중, 광주, 동복 분계를 이루는 산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피체되어 일군에 굽히지 않다가 끝내 적탄에 맞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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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모 묘
임창모(?~1909)는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임창모는 능주(綾州) 출신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능주(綾州)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치려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和順)·동복(同福)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 둔병하던 중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양회일이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하여 결국 체포되었다. 그후 양회일은 광주 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고 임창모는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해배(解配)되어 귀가하였다. 임창모는 해배되자 마자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안규홍의 보성의진은 파청대첩(巴靑大捷)·진산대첩(眞山大捷)·원봉산(圓峰山) 전투 등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승리를 구가하였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 의진과 분진(分陣)하여 보성( 城)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黑石山)에서 일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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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학규 묘
임학규(?~1909), 이명 임학순은 전라남도 보성(宝城) 출신이고 임창모(林昌模)의 장자로서 부친과 함께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친 임창모는 을사의병 운동에 참여하여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능주(綾州)에서 거의하여 광주읍으로 진군하던 중 체포되어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1908년 부친이 풀려나 돌아오자, 고향 보성 출신인 안규홍(安圭洪)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친 임창모는 선봉장이 되었으며, 임학규는 부친을 쫓아 적과의 접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부친이 1908년 6월부터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대장이 되고 보성(宝城)을 거점으로 하여 활약할 때 그 부장이 되어 함께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미촌(梶村)중위가 인솔하는 적 보병 제2연대와 보성군 복내면(福內面)에서 40명의 동지와 함께 접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전 중에 부친과 함께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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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용수 기적비
염용수(1880~1909)는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8년 3월 보성 출신 안규홍이 보성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또한 관북 출신 강성인이 의병을 이끌고 이에 합세하여 의진의 기세가 자못 떨칠 초기에 보성의진에 입대하였다. 일산에서 호군하며 군사를 모집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후 보성군 '비들기치' 전투와 문덕면의 '양가령이치'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화순 운월치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14일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평주, 반곡 작전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한 후 복내면 헌병청을 습격하여 적병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왜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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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
모충사는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125-1번지에 위치한 목조와가 3동의 건물로, 최익현을 비롯한 백홍인(‘90년 애족장)과 박태환(’91년 애국장), 창의사인 위계룡과 백형칠 등 독립운동가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백홍인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면암 의진에 들어가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2천만 동포가 왜놈들의 밥이 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고 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위계룡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최익현선생의 소명에 응하여 호남창의에 좌중군장으로 참여하였다. 박태환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전남지방의 의병장 박민홍의 우익장으로 총기로 무장한 40∼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전남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백형칠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백홍인 등과 함께 결사구국 할 것을 혈맹하고, 경고서사(敬告書社)를 호남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1908년 백홍인 등 여러 장수들과 보성, 장흥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군자금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 순절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9년 3.1운동시 귀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려 하였으나 귀향 즉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투옥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망극의 한을 품은 채 1937년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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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인 강학유적비
백홍인(1874~1952)은 전라남도 보성(宝城)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당대의 거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을 지어 각 고을로 통문을 돌렸다. 이에 백홍인은 송연제(宋淵齊)·송심석(宋心石)과 더불어 거병할 것을 결심하고 남방의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것을 권하였다. 1906년 호남 각지에 팔도사민서포고문(八道士民書布告文)을 배포하다가 장흥(長興)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5개월 간 구금된 후 석방되었다. 은밀하게 동지를 규합해오던 최익현이 안병찬(安炳瓚)과 손을 잡고 태인(泰仁)·순창(淳昌)을 거점으로 유림 인사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최익현 의진에 입진하여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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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인 묘
백홍인(1874~1952)은 전라남도 보성(宝城)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당대의 거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을 지어 각 고을로 통문을 돌렸다. 이에 백홍인은 송연제(宋淵齊)·송심석(宋心石)과 더불어 거병할 것을 결심하고 남방의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것을 권하였다. 1906년 호남 각지에 팔도사민서포고문(八道士民書布告文)을 배포하다가 장흥(長興)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5개월 간 구금된 후 석방되었다. 은밀하게 동지를 규합해오던 최익현이 안병찬(安炳瓚)과 손을 잡고 태인(泰仁)·순창(淳昌)을 거점으로 유림 인사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면암 의진에 입진하여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