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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0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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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월환 비
나월환(1912 ~ 1942)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대원들은 중국에서의 항일전이 곧 우리의 독립전쟁이라 인식하고,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청년들을 총집결시켜서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공작대장이었던 그는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제5지대는 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河南·華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서안(西安)에서 군민위안 및 일선장병위문품 모집 공연을 하였는데 그는 이 대회주임으로 "국경의 밤", "한국의 1용사", "아리랑" 등을 공연토록 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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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현 묘
김복현(1890~1969)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김창곤의 다섯째 아들이고, 이명은 김철이다. 그러나 의거 실패로 인해 부친이 처형당해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1919년에 광주에서 항일운동을 모색하는 중에 독립운동 준비회의 밀명을 받아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김철 선생과 오방 최흥종 목사는 서울로 올라가 담양 출신 국기열과 협력하여 3·1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광주에 돌아와 학생과 기독교인, 시민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진행하려 했으나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주도자임을 시인하며 자신의 이름이 김철이라고 밝히면서 이후 김철 선생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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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금성면)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로서 1894년 4월 7일 담양수성군(守城軍) 鞠仁默(국인묵)은 정읍 고후 황토현 전투에 참여 하였다(금성산성에서) 라고 씌어져 있다. 연동사 뒤편에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금성산성은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적지로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 중부 일원에서 소집된 천여명의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의 장수 전봉준은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후일을 도모하였고, 이웃 고을로부터 식량보급의 지원을 요청하던 중에 순창의 쌍치면 피노리에서 부하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어 순국하고 만다. 희생된 전봉준의 뒤를 따라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은 이곳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격전을 벌이다 희생되었다. 그러한 고결한 순국의 흔적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이렇게 산성 아래에 비석을 마련해 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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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집(기삼연 은거지)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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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기념관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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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추모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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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촌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돌담
호남창의맹소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결성한 연합의병 지휘부로 기삼연이 대장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맹소는 1908년 1월 혹한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금성산성에 머물렀다. 이때 의병부대의 동향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습격으로 의병 30여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기삼연은 인근에 몸을 숨겼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혔고, 의병들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의병의 활동 거점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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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전적지비
김태원(1870 ~ 1908)은 1870년 9월 16일, 전남 나주군 문평면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리한 지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순릉 참봉 벼슬로 시작했지만 조국의 운명이 어긋나자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갑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동학에 참여하다가 민폐를 피해 동지 율과 함께 수원으로 피난했다. 1907년 9월, 군사인 성재 기삼연이 장성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어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김 준은 고창의 적군을 무찔렀으며, 의진 전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결의했다. 1908년, 김 준은 나주, 함평, 28장성, 무안 등지를 휩쓸어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적수를 사살하고, 토벌대와 몇 차례 접전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의진 역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과 규모는 이미 체포된 부하들의 재판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 준은 광주, 나주로 이동하고 의진은 동복, 창평 등으로 옮겨갔다. 이때, 율의 진이 적의 공격으로 흩어졌지만 율과 함께 의진을 동복과 창평으로 이동시켰다. 김 율은 항상 스스로 대장으로 칭하며 활약했고, 그의 전공은 동료 의병들 사이에서 크게 평가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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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의병 전적지비
김태원(1870 ~ 1908)은 1870년 9월 16일, 전남 나주군 문평면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리한 지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순릉 참봉 벼슬로 시작했지만 조국의 운명이 어긋나자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갑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동학에 참여하다가 민폐를 피해 동지 율과 함께 수원으로 피난했다. 1907년 9월, 군사인 성재 기삼연이 장성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어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김 준은 고창의 적군을 무찔렀으며, 의진 전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결의했다. 1908년, 김 준은 나주, 함평, 28장성, 무안 등지를 휩쓸어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적수를 사살하고, 토벌대와 몇 차례 접전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의진 역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과 규모는 이미 체포된 부하들의 재판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 준은 광주, 나주로 이동하고 의진은 동복, 창평 등으로 옮겨갔다. 이때, 율의 진이 적의 공격으로 흩어졌지만 율과 함께 의진을 동복과 창평으로 이동시켰다. 김 율은 항상 스스로 대장으로 칭하며 활약했고, 그의 전공은 동료 의병들 사이에서 크게 평가되었다. 광무 10년 12월 고종은 비밀리에 고광순에게 총리 호남의병대장을 명했다. 고광순은 500여명의 의사들과 이날 창의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이 날 대장 고광순을 주장으로 부장 고제량, 선봉장 고강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 조동규 등이다. 저산 봉우리에 의병기를 세우고 이씨 제실을 대장소로 정하고 각처에 연락, 격멸할것을 다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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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추모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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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추모시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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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의병 전적지 표지석(운산정)
고광순(1848 ~ 1907)은 임진왜란 때 금산 7백 의사의 지도자로 알려진 제봉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사손(祀孫)으로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용맹한 인물이었다. 학문적인 지식을 쌓는 것에 힘썼으며, 집안의 역사는 항일 투쟁으로 가득했다. 의거를 시도하였지만 돈 뇌물로 실패하였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1907년 의병장으로 전남 구례에서 구례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동복군에서 의병 백여명을 모아 왜적과 교전한 바 있다.1907년 10월 17일 지리산에서 광주수비대와 교전하다가 화개동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