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408건
-
손대형 공적비
손대형(1911~1975)은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공립수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손대형은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손대형은 동맹휴학을 준비하다 체포돼 같은 해 12월 20일 불기소 및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오영섭 공적비
오영섭(1922~1987) 1929년 전라남도 여수군의 여수공립수산학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독서회’에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시체제기에 돌입했지만,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작은 규모의 조직 및 개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오영섭은 일본인 교사들에게“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모국어(한국어-인용자)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오영섭은 수업 거부 투쟁으로 인해 1942년 12월 21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광주검사국에 송치됐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황병익 공적비
황병익(1922~1984)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5학년 재학 중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기 위해 집회를 계획하고 수업 거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됐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황병익은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모국어(한국어-인용자)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황병익은 수업 거부 투쟁으로 인해 검거돼 1943년 12월 21일 ‘폭력행위(暴力行爲) 등 처벌(處罰)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송치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김권문 공적비
김권문(1912~1983)은 1929년 8월 전남 여수에서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여도현 등이 주도하는 비밀결사 수산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9년 8월 상순 전라남도 여수읍 서정 여운종의 집에서 6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 실현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이던 김권문 또한 독서회 조직에 참여하고, 며칠 후인 1929년 8월 상순 여운종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강령을 결정하고 ‘수산학교독서회’결성에 참여했다. 독서회 회원은 회비를 각출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재를 읽고 연구, 토론했다. 김권문은 1930년 1월 12일까지의 십 수회에 걸친 모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사상이 좋지 않음”이란 평가를 받고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김우곤 공적비
김우곤(1910~1951)은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8년 4월 전라남도 여수수산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30년 1월 여수수산학교 학생들도 격문을 제작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려고 준비하다가 체포됐다. 이에 김우곤은 광주학생운동지지 시위로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동맹휴교를 계획하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쌍산 항일의병 유적지 중동마을입구
쌍산 항일의병 유적지는 중동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이유는 쌍산의소가 양회일 의병부대의 훈련장소이자 근거지였기 때문인데, 마을 유지인 임노복에게 의병의 집결지와 훈련장소를 협조 받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이후 중동마을은 의병기지로 변모하였다. 양회일은 1905년 을사늑약이후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친동생 양회룡과 양열묵·이동화·박기년·양상길·정순학·서필환·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1909년까지 항일투쟁이 펼쳐졌으며, 기삼연 의진, 고광순 의진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의하게 된다. 1907년 7월 양회일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1908년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한 지 7일 만에 순국하였다.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쌍산의병사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쌍산의소 본부는 이 마을의 개인 소유 가옥인데 의병지도자들이 모여 창의를 계획하고, 의병처의 본부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쌍산의소는 양회일 의병부대의 훈련장소이자 근거지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후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친동생 양회룡과 양열묵·이동화·박기년·양상길·정순학·서필환·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양회일은 쌍봉사 윗마을 증동을 찾아 마을 유지인 임노복에게 의병의 집결지와 훈련장소를 협조 받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이후 중동마을은 의병기지로 변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1909년까지 항일투쟁이 펼쳐졌으며, 기삼연 의진, 고광순 의진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의하게 된다. 1907년 7월 양회일은 15년 형을 선고받고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1908년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한 지 7일 만에 순국하였다.
-
쌍산의소 유황굴 터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유황굴은 1907년~1908년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며 필요한 탄약을 만들기 위해 유황을 채취한 곳이다.
-
보성군 독립운동사적지 안내판
김상옥(1889~1923)은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붙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료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주재년 기념관
주재년(1929~1945)은 국민학교 재학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 율림리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 '일본놈 져라', '조선만세', '조선지광'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한귀재 공적비
한귀재(1911~1980)는 1931년 1월 서울 종로에서 김기범, 진옥진 등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재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하여 고학당 및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한 후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다 체포되었다. 1931년 2월말경 고학당에 재학하고 있던 한귀재는 김기범 등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재조직했다. 김기범이 중앙부책임 겸 서무부, 그는 조직부를 맡았다. 한귀재 등은 조선학생전위동맹의 세포조직으로 각 중등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귀재는 먼저 고학당의 독서회 조직을 맡았다. 이후 한귀재 등은 오문현 등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매주 토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 독서회 결성을 추진했다. 독서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해갔다. 한귀재는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1934년 8월 6일 가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재계 묘
김재계(1888~1938)는 전라남도 장흥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의 장흥 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독립운동성금 5백원을 가져가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인접 교구에 보내었으며, 면 별로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화하여 3월 15일 장흥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총지휘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른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 교도로 하여금 안심가(安心歌)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고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를 암송하며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릴 것을 지시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보고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멸왜기도」를 실시하다가, 1938년 2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 수행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일만에 그를 기소유예로 석방했으나,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되자 얼마 후에 바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