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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구) 애양원 교회
애양원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1939년에는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원탁회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7월 여수 나병원의 애양원교회 전도사가 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일제의 폭정과 우상숭배를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1940년 9월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1948년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으며, 아들을 죽게 한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자신은 6·25전쟁 기간에 납북되는 도중에 북한군에게 희생되었다. 애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병 치료시설이다. 본래 광주에 있었던 한센병원이 1909년 여수로 옮겨왔다.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시설이자 치료 및 자활을 위한 공동체로 애양원은 '사랑으로 기른다는 뜻'이다. 1928년 2층 규모로 준공되었던 애양원교회는 193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5년 재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종탑이 하나 있는 평면 장방형 석조 건축물은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양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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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 기적비
이병채(1875-1940 추정)는 대한제국기 관동지방에서 활약한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후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1896년 민용호(閔龍鎬)가 중심이 되어 설치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의 의병장이 되어 최중봉(崔重峰) 등과 관동지역의 사림 및 백성들에게 포유문(布諭文)을 보내고 그 기세를 높여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진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는 관군의 포위망에 싸여 부득이 그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서울 남산골에서 의병 1,000여명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일대격전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국권이 침탈된 뒤 1913년에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서 전라남북도순무중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만주 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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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순절지(연곡사)
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이다.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곳이다.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1896년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임병찬 등이 일으킨 태인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태인의병이 해산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2월 양한규 의병과 함께 남원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양한규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07년 중반 연곡사에 근거지를 두고 지리산에서 장기항전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17일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고광순은 순국하였고 의병도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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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식 공적 안내판
조우식(趙愚植)(1871~1937)은 전라남도 곡성 출신이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1월 전라북도 순창 구암사에서 전주 의병대 및 남원 의병대와 함께 적과 접전하였다. 음력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에서 구성한 면암의 의진은 정읍.순창.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돌아왔다. 조우식은 이즈음 면암의 의진에 합진하였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황제의 칙지와 고시문을 전해왔다. 이때 읍의 동북쪽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진위대는 의진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어 의진은 모두 흩어졌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면암의 곁에는 조우식을 비롯한 12인의 문인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공격해 들어오던 관군에 의하여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조우식은 8월에 태 100도의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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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초혼비
나철(1863~1916)은 29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권지부정자를 지내다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동지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요인을 역방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귀국 후에는 박제순(朴濟純)과 이지용(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보내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오적(五賊)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같이 권총을 구입하여 수차에 걸쳐 이들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재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가 붙잡혀 사건전모가 폭로되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그해 7월 12일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후 그는 평소에 믿고 있던 단군성도를 숭상하여 항일투쟁에 힘을 기울이다가 민족갱생의 도(道)는 국조단군의 교(敎)를 부활함에 있음을 깨닫고 1910년 7월에 단군교를 대종교로 창교(創敎)하여 제1세 교주에 추대되어 김 헌(金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으며,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에 입산하여 삼성사에서 일제의 폭정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과 일의회에 견책의 장서를 보낸 다음 국가와 교(敎)를 위하여 자결 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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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동상
이병호(이명 이병찬, 1886~1955)는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15년 7월 15일 경북 대구 소재 달성공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고 일제고관 및 친일배의 주살(誅殺)과 일제기관을 파괴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할 때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6년 전남 보성군 겸백면장(兼白面長)으로 재직하고 있는 박문용(朴文鎔)이 겸백면내에서 거둔 세금 8천원을 받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달하며 활동하다 1918년 4월경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공갈·총포류단속취체령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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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섭 공적비
조병섭(1908~1950)은 7월 여수읍(麗水邑) 덕충리(德忠里) 장도(獐島)에서 문석·하순철·이창희(李昌熙) 등과 함께 ‘여수적색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직접 공장이나 직장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병섭은 항만노동부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경에는 조직의 부서를 개편하여, 조병섭이 조면공장노동부를 맡았다. 조병섭은 12월 여수읍 동정에 있는 정호영(鄭鎬榮)의 집에서 정충조·김석훈(金石訓) 등과 회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준비로서 먼저 공장과 직장에서 독서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교양하기로 하였다. 이에 정충조로부터 받은 「잉여가치란 무엇인가」 등을 교재로 혼다정미소(本田精米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10일경,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의 기관지 『적기(赤旗)』를 각지에 배포할 당시, 조병섭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에 체재하면서 이 지역의 배포를 담당하였다. 8월경 일본 경찰이 위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여 전국에서 8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조병섭은 체포를 면하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에서 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과거 노동구제회 오사카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홍기환(洪基奐) 등과 함께 그 조직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9월 일본공산주의자단에 대한 일제당국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같은 달 13일 동지 홍기환·정암우(丁岩又)·송정효(宋正孝)·김영동(金榮東) 등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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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익표 공적비
지익표(비공개~생존)는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1월 기소유예 되었다. 당시 여수수산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한국 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한국 학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942년 11월 그는 선배 학생들과 함께 교사들을 상대로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하고 모국어를 쓸 수 있게 할 것”, “민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학교측에서 이를 거부하면 징병거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하였다. 지익표는 학교측의 기만책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광주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3년 1월 13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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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곤 공적비
김재곤(1914~1961)은 1930년 3월 여수공립수산학교 졸업생인 윤경현(尹炅鉉)과 조병호(趙炳浩) 등 재학생 9명은 공산주의 연구와 항일투쟁를 위해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했다. 3월 하순 이들은 여수 읍내 종고산 정상에서 윤경현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4월 중순 김재곤은 박창래(朴昌來) 등과 조병호의 권유를 받아 종고산 정상에서 연 독서회 총회에 참석하고 독서회에 가입했다. 7월 19일 오후 10시경 여수만 앞바다의 장군도 연안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 같은 학교 학생 10여 명을 가입시키고 반 조직을 재편성했다. 각 반은 매주 1회 모여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각 반의 대표자회를 매주 1회씩 열고 연락을 취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밀리에 조직돼 활동하던 독서회가 발각돼 체포됐다. 김재곤은 1930년 12월 24일 중도 퇴학했다. 또한 1931년 9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인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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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운 공적비
박노운(1922~1950)은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졸업생으로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기 위해 집회를 계획하고 수업 거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되었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박용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박노운은 1941년 3월 5일 학교를 졸업했으나 이 시위로 인해 검거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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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 공적비
박용수(1922~1994)는 1942년 12월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듬 해 1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박용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박용수는 5학년 재학 중 일으킨 시위로 인해 검거돼 1943년 1월 13일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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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규 공적비
성상규(1923~1951)는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의 추방과 조선어 사용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됐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성상규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성상규는 수업 거부 투쟁으로 체포돼 1942년 12월 21일 송치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