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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쟁관
군산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나흘 뒤인 3월 5일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이다. 군산항쟁관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쟁한 역사와 장소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설립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군산이었으며 다른 지방으로 항쟁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항쟁관에서는 1920년대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을 비롯한 소작쟁의에 대한 내용도 배워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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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
구농민항일항쟁은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정면 대항한 사상 초유의 농민저항운동이다. 일찍이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군산지역에서는 민족 저항 정신이 확산되면서 옥구농민조합(1926), 서수농민조합(1927), 서수청년회(1927)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악덕 농장주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7년 11월, 일본인 지주들이 공동 설립한 대규모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다. 농민조합에서는 생존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당한 끝에 11월 25일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농장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농민 간부 장태성을 술산주재소에 감금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 명의 농민들은 징을 울리며 몰려가 주재소를 부수고 장태성을 구출한 뒤 만세를 불렀다. 또한 서수주재소에 감금된 농민 간부 박상호도 구출하였다. 경찰은 80여 명의 농민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취조하였고, 체포된 농민 중 34명은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전개된 농민항일운동으로서,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항거한 대표적인 항일 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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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묘
송병선(1836 - 1905)은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송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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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모 묘
문형모(1875 - 1952)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호남통신국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호남통신국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거의하였는데, 최익현의 휘하에 들어가 전라북도 태인·무주 등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호남통신국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8년 이후는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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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모 유적비
문형모(1875 - 1952)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호남통신국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호남통신국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거의하였는데, 최익현의 휘하에 들어가 전라북도 태인·무주 등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호남통신국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8년 이후는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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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 순의비
이상운(1927 - 1945)은 1943년 이리농림학교(裸里農林學校) 2학년 재학 중에 동기생인 장지환·김구·김영준·호중기, 후배 서기용·김봉수·강동석·박기춘 등과 함께 비밀결사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선배 장이규·김직수·김환용과 교외에서 활동하던 김재두·김해룡 등이 조직한 독립단과 공동으로 행동하기 위해 제휴하였다. 화랑회 회원들은 무기와 폭약을 빼앗아 금구주재소를 습격하고 만경강에 놓인 목천교와 군산비행장 등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상운 등은 1944년 11월 폭약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제 모악산에 있는 일본인 광산에 몰래 들어갔으나 경비가 삼엄해 실패하였다. 화랑회 회원들은 체력을 단련하며 다시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4월에 일본 경찰에 조직이 탄로나 모두 검거되었다. 이상운은 일본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7월 17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운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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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구 묘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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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식 기적비
장현식(1896 - 미상)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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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사당(서강사)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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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사적비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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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식 집
장현식(1896 - 미상)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 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 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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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동농민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본 사적은 1919년 3월 20일 원평장터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룬 8명의 애국투사들과 만세운동에 참여한 어유동 농민들을 기리는 사적이다. 당시 이 마을은 40여호의 농촌으로서 전부 가난한 농민들이었지만, 주민들 대다수가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었고 특히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전도명은 원평 구미난 싸움의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다. 만세운동 당일 이 마을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원평장터로 달려가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대표 8명은 일본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그 이튿날 새벽에 일본헌병 100여 명이 이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을 하였다. 군화발로 안방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뒤지고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발로 걷어차며 총대로 욱박질렀다. 그러나 이 마을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위와 같은 어유동 농민들의 숭고한 독립투쟁정신을 받들고 길이 기억하고자 본 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