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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과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구암동산에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을 건립하여 그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다. 군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실현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및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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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 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에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수백 장)를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에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여 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든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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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옥삼일운동기념비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는 1919년 4월 군산과 그 외곽 옥구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조국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국권회복과 광복을 위하여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 옆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의 만세상도 건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군산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이 21회이며, 동원 참가 인원이 총 25,800명이고, 피검자 145명, 사망자 21명, 부상자 37명이었다. 옥구 군내의 3.1운동 만세시위 역시 3월부터 5월까지 7회의 만세시위와 5,700명이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50명의 피검에 32명 사망, 35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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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옥출신독립운동공적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군산 옥구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전투,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군산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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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순 공적비
심재순(1899 - 1939)은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 졸업 후 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에서 2년간 수업하고 서울에 와 대동인쇄주식회사에 다니면서 부기학교에 통학하였다. 1925년 5월 부기학 연구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某] 경영의 춘양당(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경부터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로 일하였다. 그는 이 인쇄소에서 주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독립 실현의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경 전북 옥구(沃溝)의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동년 12월 일본 도쿄에서「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군산(群山)·강경(江景)·논산(論山) 등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가와사키[川崎]·오오쿠라[大倉]·척식회사(拓植會社)·불이회사(不二會社)·이엽사(二葉社)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은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한 이 글은 국내의 신현국(申鉉局)·심상악(沈相岳)·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심호택(沈鎬澤)에게 발송되었고, 특히 신현국은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에 관련된 농민들에게 이를 배부하였다. 1928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9월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옥구로 귀향하여 활동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1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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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 공적불망비
이인식(1901 - 1963)은 일제강점기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군자금 모집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춘고(春皐). 전라북도 옥구 출생.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정동 예배당 구내의 이필주(李弼柱)목사 집에서 중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실행을 계획하였는데,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 백절불굴의 투지로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으로 학생들을 참석하게 하고 선언서를 배포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미국영사관과의 연락 책임을 지고 활동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 서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하자마자 전재산을 방매하여 동삼성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에게 8,000원의 군자금을 주고 군자금모집원이 되어 계속 투쟁하였다. 그 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고 8·15광복 이후 고향에 임피중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고 전라북도교육위원에 선임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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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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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렬 구 묘
김홍렬(1898 - 1924)는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 연락 요원으로 1919년 2월 28일 서울 천도교 교구당에서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5,000장을 전해 받아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3월 5일 서울 시내에서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향인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25일 자택에서 진장권(陳壯權), 김석종(金錫宗), 황봉규(黃琫奎), 최한례(崔翰澧) 등과 함께 3월 29일 임피시장에서 만세운동할 것을 계획하였다. 3월 28일 진장권의 집에서 태극기 200매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에는 김석종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독립만세시위 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4년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삼성구락부(三省具樂部)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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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묘
김영현(1907 - 1944)은 일제강점기 길림성에서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군산 출신. 수원고등농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9월 사상이 불온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배일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투신한 뒤 군자금 200원을 모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32년 7월 권총 등의 총기를 휴대하고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마포·서대문·함흥 등지의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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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집
임병찬(1851 - 1916)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주1 · 군량 · 연병(鍊兵)주2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 · 정읍 · 순창 · 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주3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 · 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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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민 충혼비
고봉민(1862 - 1919)은 전라북도 옥구군 구읍면 옥정리 출신이다. 1913년 임병찬(林炳瓚)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자 이에 호응하여 옥답 십여 정보를 매각하여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전북순무영 경리관(全北巡撫營 經理官) 겸 만경군 소모사(萬頃郡 召募使)로 임명되어 의병모집에 앞장섰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병고를 무릅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분기로 인하여 병이 도져 1919년 6월 5일 별세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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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민 묘
고봉민(1862 - 1919)은 전라북도 옥구군 구읍면 옥정리 출신이다. 1913년 임병찬(林炳瓚)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자 이에 호응하여 옥답 십여 정보를 매각하여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전북순무영 경리관(全北巡撫營 經理官) 겸 만경군 소모사(萬頃郡 召募使)로 임명되어 의병모집에 앞장섰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병고를 무릅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분기로 인하여 병이 도져 1919년 6월 5일 별세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