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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진 의적비, 고예진 추모비
고용진(1850 - 1922)의 자는 운서, 호는 송재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의군부 회계총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4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최익현(崔益鉉)이 강회(講會)를 가장하고 의병을 일으키자, 강종회(姜鍾會) 등 포수 30여 명을 이끌고 의병으로 들어갔다. 1912년 임병찬(林炳瓚)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1914년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자, 회계총관을 맡아 활약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의 서명운동도 전개하였다. 동생인 고예진(高禮鎭)·고광순(高光洵)·고광채(高光彩)·고석진(高石鎭) 등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1875 - 1952)의 자는 수문, 호는 송천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의군부 총무국 서기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이 최익현(崔益鉉)과 거사할 것을 계획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1906년 4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생과 포수들을 규합하여 면암 최익현이 이끄는 의진이 구성되자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 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14년 고종의 명으로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국서기관이 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長書)에 서명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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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진 강학비
고석진(1856 - 1924)는 대한제국기 때, 최익현의 태인의거에 가담한 의병장이다.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태인의거(泰仁義擧) 때 참모로서 최제학(崔濟學)·최학령(崔學領)·이용길(李容吉) 등의 의사들과 함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데 활약하였다. 그 해 6월 5일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으나, 6월 11일 전주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 및 일본군에 포위되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이튿날 최익현·임병찬(林炳瓚) 등 13명과 함께 붙잡혀 전주 진위영(鎭衛營)으로 호송되었다. 6월 18일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고 4개월간의 구류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임병찬이 밀조(密詔)를 받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참모관으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1914년 2월 독립의군부의 참모총장의 칙령을 받았다. 1919년 전국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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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형 집
이철형(1873 - 1918)의 이칭은 철형(喆衡)이며, 대한제국기 장성, 함평, 영광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9월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기삼연(奇參衍)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결성되자, 진사였던 이철형은 군사를 이끌고 이에 합류하여 중군장이 되었다. 기삼연·김용구(金容球)·전수용(全垂鏞)·이석용(李錫庸)·김준(金準)·이남규(李南奎) 등의 중심인물과 함께 국민들의 항일 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로 발송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어서 11월 3일 전라남도 영광군 진량면(陣良面) 산하치(山下峙)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법성포에 이르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10여 명을 사살하고 일인 거주 가옥 10여 채와 무기를 불태웠다. 11월 19일에는 김용구 등과 함께 다시 영광읍성 남문을 공격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성곽이 견고하여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1908년 1월 19일에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였으나, 쌍방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1909에 들어서는 전라남도 영광군 외동면에서 네 차례에 걸쳐 군자금 36원과 당목(唐木)·백목(白木) 등 2필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이철형은 1907년 9월 이후 1909년 1월까지 장성·함평·영광·고창 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다가, 6년 7개월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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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동 묘
유금동(1909 - 1930)은 1909년 9월 15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을 전해들은 유금동은, 고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20일 동급생 유일석(柳日錫)·윤정하(尹鼎夏) 등과 함께 동교생들의 동조 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러고는 곧 무기 휴학을 단행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구류 20일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구류 중 동교생인 이재천(李載千)에게 만세 시위 계획을 말했다가 이재천이 밀고하여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일본 경찰에 의해 다시 체포된 뒤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하다 같은 해 6월 2일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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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삼 묘
김공삼(1865 - 1910)의 자는 공삼, 본명은 김봉규이다. 1865년경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천원면(川原面) 천원리(川原里, 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창군(高敞郡) 고사면(古沙面) 가협리(加峽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다. 본명은 김봉규(金奉奎)이지만 자(字)인 공삼(公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학자 출신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김봉규전(金奉奎傳)」에 따르면, 키가 크고 수염을 길렀으며 원래 가협산(加峽山)에서 궁벽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휘하에서 스스로 가문이 낮아서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 어려워 지휘관에 적합지 않다며 사양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정미의병(丁未義兵)의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미 1906년 12월 26일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한 후, 기삼연이 1907년 9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조직할 때 중군장(中軍將)에 임명되었다. 1907년 10월 의병 활동에 사용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전북 고창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전남 담양(潭陽)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일본 순사 및 수비대와 접전을 벌였다. 1908년 2월 4일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수비대에 체포된 이후 남은 의병들 200여 명을 규합하고 각종 무기를 수습하여 의병장으로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1908년 3월 27일에는 전남 장성(長城)의 송치(松峙) 산간에서 일본군 4명을 저격 사살하였고, 같은 해 4월 6일에는 장성 월반(月半) 장터에서 일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3명을 저격 및 근접 전투로 살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에는 전북 무장(茂長, 1914년 고창에 통합) 와공면(瓦孔面) 군유리(群儒里)에서 기병(騎兵)과 교전하여 기병 7명을 사살하였다. 1909년 3월 16일에도 전북 고창과 부안(扶安) 접경의 변산(邊山)에서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일제의 전면적인 탄압 작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1909년 8월 5일 전북 고창 고사면(古沙面) 가협리(加峽里)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고창 방장산(方丈山) 기슭 강원도촌(江原道村)의 정(鄭) 아무개 집에서 재기(再起)의 때를 기다리며 은신하고 있었으나 첩보를 입수한 고창수비대에게 9월 20일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8일 통감부(統監府) 검사(檢事) 이시카와 시게노부(石川信重) 입회 하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자 다시 상고하였고 1910년 3월 2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었다. 이후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고창의 인사들이 경비를 모아서 김공삼의 시신을 고향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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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진, 고예진 추모비
고순진(1863 - 1938)의 자는 의경, 호는 만취이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고순진은 일찍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생 고예진(高禮鎭)에게 격문 2백여 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게 하였다. 또한 최익현 의진(義陣)에 조총을 제공하고 군자금을 내놓는 등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3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 유림들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2,674자의 장문으로 된 청원서에 한국 유림 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金昌淑)이 상해(上海)에 전달하여 당시 한국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1875 - 1952)의 자는 수문, 호는 송천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의군부 총무국 서기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이 최익현(崔益鉉)과 거사할 것을 계획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1906년 4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생과 포수들을 규합하여 면암 최익현이 이끄는 의진이 구성되자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 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14년 고종의 명으로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국서기관이 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長書)에 서명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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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진 묘
고예진(1875 - 1952)의 자는 수문, 호는 송천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의군부 총무국 서기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이 최익현(崔益鉉)과 거사할 것을 계획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1906년 4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생과 포수들을 규합하여 면암 최익현이 이끄는 의진이 구성되자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 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14년 고종의 명으로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국 서기관이 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長書)에 서명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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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서원(낙영당)
낙송병선(1836 - 1905)의 자는 화옥, 호는 동방일사, 연재, 시호는 문충이며,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병선이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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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로 집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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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로 묘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 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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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기념비(구암교회)
군산3.1운동기념비는 군산의 자긍심을 세우고, 선열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및 후세까지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군산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인 구암동산에 건립한 비이다.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주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과 양기준, 유한종 등의 예수병원 직원들이 합세하여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에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이 잡혀가자 계획한 다음날을 기다리지 않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출발하여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점차 수가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약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에 투옥되었고,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는 헌병대와 일본경찰들이 수색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심지어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에서 3월 5일에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이후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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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기념비(구암동산)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주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과 양기준, 유한종 등의 예수병원 직원들이 합세하여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에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 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이 잡혀가자 계획한 다음날을 기다리지 않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출발하여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점차 수가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약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에 투옥되었고,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는 헌병대와 일본경찰들이 수색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심지어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에서 3월 5일에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이후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군산의 자긍심을 세우고, 선열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및 후세까지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군산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인 구암동산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