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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남 추모비
고제남(1887~1909)은 고석진(高石鎭)의 문인으로 전북 고창 사람이다. 스승 고석진은 고제만(高濟萬 致範)과 함께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부름에 호응하여 정산(定山)에서 기의하여 태인(泰仁)일대에서 활약한 바 있다. 고제남은 그 영향을 받아 1907년 의병장이 되어 동지 김영백(金永伯) 이화일(李花一) 등 의병 2백 여명과 더불어 장성군 일대를 행군하면서 창의 포고문(倡義布告文)을 살포하고 정읍(井邑)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1908년 흥덕(興德) 소려령(小蘆嶺) 등에서 왜군과 접전하고 일군 병참소(兵站所)를 공격하여 장총 3정 군도 5정 및 탄환 다수를 노획하였다. 1909년 동지들과 정읍군 소성면(所聲面)에서 작전 계획을 구상하던 중 일헌병에게 체포되어 북이면 헌병분견소(北二面 憲兵分遣所)에서 총살되었다고 전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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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사당(옥제사)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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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의적비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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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묘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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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주 기적비
이종주(1901 ~ 1921)는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1920년 3월 10일을 전후하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하여 3월 10일 밤에 이종철(李鍾喆)·이대성(李大成)·유판술(劉判述) 등의 동지들과 함께 그의 집에 모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구한국 구기를 만들어 이를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꽂아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날 밤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문 수천매를 등사하여 각처에 배부하고 태극기 12매를 만들어 대한독립이라고 써넣은 다음, 이를 파기하는 자는 참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성내면사무소 구내의 공터에 꽂아 놓고 시민들의 독립운동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3월 12일 성내면장의 고발에 의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1월 15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7월 13일 대구(大邱)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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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구 집
황영구(1918 ~ 1947)는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 한동정(韓東正) 등의 동교생들이 1933년 경에 조직한 사상연구단체인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2월 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두 학생의 복교를 요구하며 교실에서 농성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반제동맹의 조직이 노출되어 그는 1935년 6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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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포교 활동지 도소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으로서 황토현·황룡촌 전투의 승리에도 기여했으나,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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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해 충효비
정시해(1872 - 1906)의 자는 낙언, 호는 일광이며, 대한제국기 최익현 의병부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으로 활동한 의병이다. 1905년 말 시묘(侍墓)를 마치고 하산하자,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 최익현을 찾아갔다. 당시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 지친 최익현은 정시해에게 영남지방의 지사를 규합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동지 규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으로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고, 일광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906년 봄,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영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거의모사(擧義謀事)에 참여하였다. 영남과 호남의 의병이 함께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다시 영남으로 떠나 19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최익현의 의거 소식을 듣고 모여든 지사와 포수(砲手)는 날로 늘어나, 지방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6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召募將兼中軍將)으로 태인을 출발하였다. 6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로 진을 옮기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6월 8일에는 곡성으로 진출하였다. 6월 10일 순창으로 회군해 포진 중, 6월 11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 ·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충돌하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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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구 집
최전구(1850 - 1938)의 자는 우서, 호는 지은이며, 대한제국기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 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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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구 추모비
최전구(1850 - 1938)의 자는 우서, 호는 지은이며, 대한제국기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 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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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구 망오단비
최전구(1850 - 1938)의 자는 우서, 호는 지은이며, 대한제국기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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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사(道東祠)
도동사(道東祠)는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에 있으며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 운동의 발상지였다. 먼저 면암 최익현이 1880~1890년대 방호정사(方壺精舍)를 자주 오가며 80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또한, 이후에는 고석진과 고예진이 인재를 양성했다. 고용진ㆍ고석진ㆍ고예진은 1905년 말 을사조약에 항거해 의병 봉기를 계획한 뒤 충청남도 청양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던 최익현에게 의병 봉기를 강력히 주청해 허락을 받았고, 도동사 자리에서 의병 100여 명을 소집해 본격적인 봉기 준비에 나섰던 인물이다. 도동사는 1920년대 초반 고순진(高舜鎭)ㆍ고예진(高禮鎭) 형제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전국의 유림들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의 숭고한 도학 정신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고자 건립을 추진했던 사당이다. 그러나 1924년 3월 일제의 강압으로 공사가 중지되었다. 이후 1928년 3월에 전국의 유림들이 다시 사당을 완공했으나 일제가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향사(享祀)를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8ㆍ15해방 후인 1946년 6월 6일 처음으로 최익현과 고석진을 함께 모시고 향사를 하였고, 1962년에는 송천(松川) 고예진을 모셨고, 1997년에는 송재(松齋) 고용진을 추가로 모셨다. 도동사 에서는 매년 양력 5월 5일에 전국의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를 올리고 있다. 2002년부터는 유림들의 합의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벽에 최익현을 모시고, 고용진, 고석진, 고예진 순으로 변경하여 제를 모시고 있다. 도동사 외삼문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방호정사가 위치하며, 그 뒤에 다시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사당[도동사]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외삼문 뒤편에는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 1기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사당 앞으로는 돌로 쌓은 수로(水路)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2004년 6월 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