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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3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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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지 용바위
마이동천의 입구에 위치한 이곳 용바위는 호남의병대장 이석용이 전기홍과 함께 호남 의남아 500여 명을 규합하여 황단을 쌓고 천지신명께 국권회복을 빌며 군률을 세우고 대오를 정비하여 삽혈동맹의 의로운 깃발을 꼽았던 호남의병창의의 터이다. 갑오동학혁명 이후 가뜩이나 침체되어있던 호남의 사기가 을사늑약을 거치면서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1907년 가을에 토왜멸적을 부르짖는 격중가가 드높이 메아리쳐 호남천지에 의로운 뜻이 되살아난 이 자리는 곧 호남 최초 자발적인 의병운동의 근원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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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상 항일운동 기적비
전영상(1895 - 1958)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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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엽 유적비, 추모비
정종엽(본명 정진희, 1885 - 1940)은 전북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며 구국의 일념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 해 1911년 3월 옛 동지 몇 명을 규합하여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왕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912년 이석용(李錫鏞)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비밀 결사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진안(鎭安)지역 단원으로 참여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국 망명을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동년 10월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후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거주하면서 이석용 의병장의 제례(祭禮)를 주관하였고, 후진양성과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반대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다가 1940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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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상 묘
전영상(1895 - 1958)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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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송병선(1836 - 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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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추모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진안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강신홍, 김경선, 김규현, 김사범, 김암우, 김영필, 김옥현, 명경안, 박동근, 박재열, 박재춘, 서성일, 신치수, 심우상, 안성, 안왈오, 안일, 양인문, 오기열, 이옥동, 임종문, 전영상, 정진희, 조경화, 채도석, 최병무, 하준태, 한청여, 황준성 선생 등이 있다. 진안군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높이 7.5m 규모로 이 탑을 세웠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5월 이를 현충시설로 지정한 후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그 숭고한 의식을 후대에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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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 비
본 비는 1907년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마이산에서 결성된 의병 부대인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에 관한 사적이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湖南 義兵 倡義 同盟團)은 1907년 9월 이석용(李錫庸)이 주도하여 진안 마이산에서 결성되었다. 이석용은 마이산에서 고천제를 거행한 후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석용도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석용은 9월 12일 전라도 각지에서 규합한 동지들과 마이산에 모여 고천제를 거행하였다. 마이산 용암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이 날에 모인 의병 수가 500여 명이며 거사를 성원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고천제가 끝난 후에는 만장일치로 이석용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이석용은 단상에서 창의의 결의를 다짐한 후 의병이 지켜야 할 약속 15개 조항과 의령 10개 조항을 선포하였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지휘부는 의병 대장 이석용, 선봉 박만화·최덕일·송판구, 중군 여주목·박운서·김성학, 후군 김사범·윤명선·전성학, 참모 전해산·한사국·이광삼, 총지휘 박갑쇠·곽자의·임종문, 연락 홍윤무·박성무·윤병준 등으로 구성되었고 기타 진안 출신의 의병으로 김사범·김암우·김운서·박금동·박보국·박학수·서성일·신성운·오기열·임영기·정종엽 등이 있다. 일제는 1908년 10월부터 약 1만여 명의 병력으로 호남 의병 토벌대를 편성하여 3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하였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이석용은 후일을 기약하며, 1909년 3월 6일 휘하의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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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열 기적비
오기열(1888 - 1950)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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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학 기념비
습재 최제학(1882 - 1961)은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진안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면암은 판서 이용원·김학진·관찰사 이도재·참판 이성렬·이남규 등에게 글을 보내어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면암은 제자들과 의논하여 태인에 있는 돈헌 임병찬과 제휴하기로 하였으며, 이어 1906년 3월 3일 최제학은 면암의 서신을 가지고 돈헌을 찾아가 일을 성사시켰다. 이에 면암은 최제학 등 문인과 함께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회동하여 유생 80여 명의 호응을 받아 6월 5일 정읍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하고, 6일 순창으로 들어가 무력을 보강하고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다시 회군하여 오산촌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돈헌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가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 틈에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면암의 곁에는 20여 명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의병들이 대항하지 않자, 적은 포위망을 좁혀 왔으며, 이튿날 전원을 경성으로 압송한다는 황제의 칙명을 전달하였다. 이 때에는 면암과 최제학을 비롯한 13인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전주를 거쳐 6월 18일 경성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김기술·문달환 등은 석방하고, 최제학·고석진은 구류 4개월, 그리고 면암과 돈헌은 8월 하순 대마도 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최제학은 1907년 1월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의 운구에 참여한 후 지리산 중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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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동상
이재명(1887 - 1910)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였다. 1906년 3월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역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으며 인력거 밑으로 쓰러진 이완용을 난자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에게 붙잡혔다.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0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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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념관
이재명(1887 - 1910)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였다. 1906년 3월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역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으며 인력거 밑으로 쓰러진 이완용을 난자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에게 붙잡혔다.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0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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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임 묘(송병선의 종)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 파기 및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겨놓고 음독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 선생의 비복이자 계집종이었던 공임(恭任)도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1906년 칼로 목을 베어 함께 자결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특별한 사연을 기리기 위해 의비 공임의 묘를 송병선의 묘 옆에 작게 조성하였다. 송병선(1836 - 1905)는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고종은 송병선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