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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관 공적비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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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관 집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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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완 묘
김영완(1896 ~ 1919)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무장읍(茂長邑) 장날을 이용하여, 이용욱(李用郁)·김용표(金容杓)·김상수(金相洙)·이준구(李準求)·김진호(金辰鎬)·박흥선(朴興先)·오태근(吳泰根)·박흥수(朴興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 참관 차 상경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이용욱·김용표 등의 유지들과 만나 서울의 정황을 전하고, 3월 15일의 무장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계획대로 장터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미리 제작·등사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1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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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의사 추모비
유한의사 추모비는 일광 정시해, 강재 오장환, 입신 유경구, 참봉 김재화 네 분의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정시해(1872~1906)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6년 4월 최익현이 기의하자 그의 친서를 영남의 지사들에게 전달, 영남에서 면암의 의거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병력 모집을 관장하는 소모장이 되어 6월 정읍으로 나아갔다.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돌아왔으나, 조정의 진위군을 맞아 관군과 싸울 수 없다며 면암이 전투를 포기하였다. 진위대의 공격 속에서 정시해는 순국하였다. 이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강재 오장환(1863~1909)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그는 기삼연(奇參衍), 전해산(全海山, 垂鏞), 이대국(李大國), 김태봉(金泰鳳) 등 동지와 같이 거의하였다. 이들은 장성 및 고창, 영광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활동하였다. 오장환은 기삼연 의진에서 1907년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 1909년 6월까지 적과 교전해 전과를 올렸다. 1909년 6월 10일 야밤을 틈타 귀가하여 가사를 정리하던 중, 광주에서 기습해 온 경찰에게 회유를 권유받았으나 격투 끝 체포되어 반항 중 현장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입신재(立身齋) 유경구(庾敬求)는 고창 공음면 출신으로, 부모의 6년 시묘살이와 의로운 거사로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 높았다. 한일합병이 일어나자 영광 구수산에 들어가 칩거하던 중 1918년 12월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이를 통분하여 기미년(1919) 정월 7일 절립이사(絶粒而死)하였다.1963년 고창군의 주도로 이들 네 의사를 기리기 위한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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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진격로 안내판은 고창 무장읍성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감영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남으로 내려와 정읍 흥덕을 거쳐 8일 석양에 고창으로 진주하여 먼저 옥문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혀 있는 동학교인 7명을 석방시켰다. 동헌과 아사를 부수고 들어가 인부를 접수하여하였으나 이미 현감이 도피한 후였고 군기와 장적을 압구하고 동부에 있는 은대정(제주도 대정 현감을 지낸 은수룡)의 집으로 몰려가 가산을 부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신시(오후 4시전후)에 농민군 일만여명은 무장읍내로 들어가 옥중의 동학교인 44명을 석방하고 성내외 7거리 인가에 방화하니 화염이 충천하였다. 무장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3일동안 머물면서 황토현싸움 이래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이미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 초토사가 거느리는 경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읍에서 5리쯤 떨어진 여시뫼봉에 진을 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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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호산봉과 1차 봉기 모의지)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호산봉(여시뫼봉)과 1차 봉기 모의지에 대한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산봉은 순 우리말로 여시뫼봉이다. 또는 왕재산이라고도 한다. 호산봉에서 보면 낮은 산 같지만 반대편은 지대가 낮아 산이 높아 보이고 또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탁트인 전망이 장성 영광 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을 접수하고 3일 동안 머물며 휴식을 취할 때 농민군의 일부가 호산봉에 진을 치고 휴식과 재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호산봉 남쪽 아래 마을이 신촌인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서인수 등 13명이 김성철 접주집에 회동 손화중을 설득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 김성철 접주는 그 준비 공작금으로 쌀 50석을 내놓았으며 그의 아들 김홍섭은 전봉준 장군 수행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천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京軍)을 크게 물리치고 다음날 전주성을 향해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곳부터 남도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합류하게 된다. 말무덤(큰무덤) 뒷편의 오솔길이 영광 함평 목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또한 오솔길을 가다보면 오른쪽 산 밑에 바가지 샘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이 좋다. 농민군들이 숙영할 때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 접주의 집자리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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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사충혼탑
오열사 충혼탑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유공자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준 열사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후대에게 위국충절의 정신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 설립된 이 충혼탑은 고창북중학교를 설립한 이승연 선생이 1977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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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피체지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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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사당(덕산사)
백정기(1896~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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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희 묘
노병희(1849 ~ 1918)는 전북 고창(高敞) 출신으로서 일찍이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군자금에 충당시킬 목적으로 현금을 준비해 두었다가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06년 4월 면암이 의진의 거점을 태인(泰仁) 일대로 확정하고 남하할 때 16일에 미리 종성리(宗聖里)에 당도하였다가 최학엽(崔學燁)·고석진(高石鎭)·고제만(高濟萬) 등과 더불어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면암은 일찍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일본의 주목을 받아 왔으므로 곧 이들의 의병운동은 관군과 일병의 추격을 받아 끝내 면암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 등은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고 말았다. 본래 면암은 노환의 지병을 갖고 있었으므로 곧 득병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연락을 받은 노병희는 12월에 한의(漢醫)의 자격으로 대마도로 가서 치료에 전력을 다하다 끝내 별세하자 호상(護喪)으로 참가하여 유해를 본국으로 반장(返葬)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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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룡 묘
노진룡(1894 ~ 1950)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말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밀명을 띠고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은 국내 각지에 임시총판부(臨時總辦府)를 설치하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중 임시정부의 총판부설치에 적극 찬동하여 전북감독부(全北監督府)를 조직하고 감독에 취임하였으며, 부감독에 오의균(吳毅均), 재무원에 이휴열(李烋烈) 황종관(黃鍾寬), 고문에 강대직(姜大直) 이석열(李錫烈) 나홍균(羅鴻均) 이종택(李鍾澤) 등을 임명하고 군자금 모집, 격문 살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22년 5월에 노진문(魯鎭文) 김성균(金聲均) 등과 함께 전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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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운동사적비
대한독립운동사적비는 경술국치 이후 3.1 운동부터 임시정부, 국내외 항일투쟁 등의 역사를 회고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해당 비석은 1960년 삼일절 고창군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