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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용균 집
나용균(1895 - 1984)은 전라북도 읍성 사람이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종로에 정착하였다. 1918년경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김도연 등 7명과 같이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비밀회합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인으로 유학하는 남녀학생 청년 등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 8독립선언을 실현케 하였다. 즉 그는 2 8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재정책임의 사업을 분담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귀국, 송진우김성수 최린 등 독립지사를 차례로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 같은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에 자극되어 이들은 그들대로 3 1운동을 중앙중학교 중심으로 계획하게 된 것이다. 그는 2 8독립선언이 있은 뒤 주모자가 체포되고 막후 연루자도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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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가족묘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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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집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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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기념관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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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장터
말목장은 부안과 태인과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형성된 시장으로 배들평야의 농산물과 부안 줄포의 수산물이 거래되던 큰 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봉기(1894.1.10.) 당시,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수 천 명의 배들평 농민과 동학교인들이 모인 곳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현한 동학농민군의 첫 집결지이다. 수천의 군중이 이곳에 모였을 때,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감나무 아래에 서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을 설명하고 이에 맞서 봉기할 것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수천 군중이 호흥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니, 바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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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집(정읍)
1878년(고종 15년)에 지어진 남향 초가집으로,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 전봉준(1855 - 1895)이 살던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이 나란히 일자형으로 있는데, 이는 남부 지방 일반 민가의 구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 등을 지내며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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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김도삼 사당
김도삼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 리 집강에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의 한 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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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혁파비
만석보는 개항기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했다.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 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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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농민봉기 기념 상징조형물
고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옛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 이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 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혁명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기념하고자 본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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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유지비
만석보는 개항기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했다. 조병갑(趙炳甲)은 고부에 부임하여 멀쩡한 보 아래 새로운 보를 쌓기 위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부역을 시켰다. 보가 완성이 되자 수세(水稅)라는 명목으로 보세(湺稅)를 받았는데, 한 두락에 상답은 2두, 하답은 1두씩을 받아 예동·두전·백산에 700여석을 쌓아놓았다. 이로 인하여 1894년 정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때려부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1973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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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시비
만석보 터는 현재 지방기념물 만석보 제33호이다.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만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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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치만 공적비, 유적비
진치만(1876 - 1925)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을 위하여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한 임병찬(林炳瓚)의 부하로서 활동하였다. 1916년 광무(光武)황제의 유명서(諭命書)를 제작하고 비밀결사 청림교(靑林敎) 일파인 흠치교의 포교를 가장(假裝)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등 지속적인 활약을 하였다. 이같은 정황이 일경에 탐지되어 1917년 5월 홍성(洪城) 경찰서에 붙잡혀 같은 해 7월 7일 평북(平北) 신미도(身彌島)로 1년간 유배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