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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전적지 완산칠봉 표지석
완산칠봉은 전주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장군봉, 탄금봉, 매화봉, 옥녀봉 등 7개의 봉우리를 통칭한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5월 8일 철수할 때까지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민군은 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후 신묘한 전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들어섰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와 용머리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확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5월 3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5월 8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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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는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사건을 기념하여 1991년 8월 완산칠봉 전적지에 건립되었다.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5월 8일 철수할 때까지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민군은 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후 신묘한 전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들어섰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와 용머리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확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5월 3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5월 8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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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고개 표지석
용머리고개는 동학농민군의 완산전투 중 5월 2일에 도달했던 곳을 말한다.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은 1차목표를 달성했다. 무장기포 이후 한 달여 남짓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잇따라 점령하여 치밀한 작전으로 관군을 유인한 뒤 전주성을 마침내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농민군은 그동안 유인작전으로 관군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으나 전주성 입성으로 관군과의 정면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전주성을 놓고 농민군의 수성과 관군의 공성으로 치루어진 완산전투는 향후 동학농민혁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홍계훈의 관군은 4월 28일 전주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다음날이었다. 관군은 바로 완산에 진을 쳤다.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의 삼면칠봉으로 이루어진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주성 남쪽을 빙둘러 요소요소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관군과 성을 차지한 농민군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함으로써 전주는 일촉즉발의 전운속에 휩싸였다. 수성과 공성의 입장이 바뀐 농민군과 관군의 완산전투는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홍계훈의 관군은 28일 진을 친 직후 곧바로 농민군이 주둔한 전주성을 향해 야포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성을 나와 동서로 완산칠봉을 오르려했으나 저지당했다. 이날 오전부터 날이 저물도록 양군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에 대해 홍계훈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자 30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군 측에 다소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관군이 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서 경기전이 훼상했고, 성 안밖의 수천 호가 불에 탈 정도로 관군의 포격이 격심했다. 이후 며칠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할 때 관군이 회선포를 쏘아 농민군 수백 명이 사살당했다. 5월 1일에는 “적은 남문으로 대대가 떼거리로 몰려 나왔지만, 관군이 회선포를 발사하자 맥없이 흩어져 다시 달아났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2일에는 농민군이 서문쪽으로 몰려나와 용머리고개의 관군 진영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또다시 대포를 계속하여 발사하자 다시 물러났다. 연이은 대포공격에 농민군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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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구국운동 추념비
김영호(1894 - 1940)는 1894년 6월 3일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완산정(完山町, 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전주읍내에서 철물상을 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전주지역 만세시위를 촉발시키는 주도자 역할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천도교 전주교구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주 읍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3·1운동이 전개되기 전인 1919년 2월 27일 서울 수송동(壽松洞)에 거주하던 보성사(普成社) 간사 인종익(印宗益)이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3천여 매를 받아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하며 3월 2일 밤까지 사람 왕래가 많은 사거리에 배포토록 하였다. 이때 민영진(閔泳鎭)·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 등과 함께 가담하여 전주 지역에 만세시위를 촉발시켰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919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국민회 전주지부(全州支部)를 설치하고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20년 3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 독립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경고문 등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였다. 이때 경고문 50매를 받아 전주 읍내에 배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애국금통지서(愛國金通知書)를 받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일로 1922년 2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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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구국운동 추념비
이기(1848 - 1909)의 자는 백증,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이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이기(李沂)[1848~1909]는 30대 중반부터 생활 근거지를 구하여 김제·대구·순창 등지를 전전하다, 44세에 황현(黃炫)의 주선으로 구례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학문과 세무에 뜻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고부로 가서 전봉준에게 서울 진격을 제의한 뒤 남원의 김개남에게 찾아갔으나 그가 이기의 제안을 거부하여 구례로 돌아갔다. 갑오경장 후 상경했는데, 1899년의 거부로 반대로 구례 자택으로 돌아왔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지위원으로 충청남도 아산에서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과 세정을 바로잡는 체험을 했다. 1905년(고종 42)에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기 위해 도미를 추진하였으나 일본공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대신 일본 동경에 가서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부 요인에게 서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 추진을 논박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3월에는 나인영(羅寅永)[羅喆] 등 10여 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갔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뒤에 자강회원 계연수(桂延壽)·이연보(李延普)·김효운(金孝雲) 등과 함께 단군을 신봉하는 ‘단학회(壇學會)’를 발기하여 종교운동을 벌이려고도 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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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3.1운동 발상지(남문시장)
전주 3.1운동은 1919년 3월 13일부터 4월 3일까지 근 20여 일간 전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학생과 천도교·기독교계 인사들, 시민들이 함께한 시위운동으로서, 이후 김제·부안·옥구·이리·익산·임실·정읍 등 전주 인근 지역의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1919년 3월 13일 전주읍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 소리를 신호로 천도교·개신교 신자,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150명이 남문시장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기전 여학생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신흥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大和町)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앞까지 행진하였다. 우편국 앞에서 총을 발사하는 일제 경찰과 부딪친 만세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다가, 오후 3시경 다시 모여 본정(本町) 우편국까지 행진하였다. 일제는 헌병과 소방대원 약 50명을 동원하여 만세 군중에게 물을 끼얹고 소방 갈구리로 부상을 입혔다. 그날 밤에도 2~30명씩의 집단으로 혹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 날의 만세 운동으로 전주 읍내에서 3백여 명이 검속되었다. 3월 14일 박상선(朴尙鮮)·백남두(白南斗) 등 약 3백 명이 완산정(完山停) 완산교 부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 2정목까지 진출하였다. 3월 17일 초포면(草浦面) 송전리(松田里) 들판에서 동민들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4일 삼례면(參禮面) 삼례리 삼례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3일 전주 장날에는 수천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경찰서·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4월 3일 김봉근(金奉根)은 일본기를 게양하고 장사를 계속하는 상인을 찾아가 철시를 요구하는 등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신(金敬信)·김봉호(金奉昊)·김점쇠(金点釗)는 각 징역 1년, 권봉화(權奉和)·김대희(金大熙)·김수천(金壽千)·김인철(金仁喆)·노성용(盧成用)·박상선·박찬문(朴贊文)·배순길(裵順吉)·배윤명(裵允明)·백남두·이판쇠(李判釗)·최갑쇠(崔甲釗)·최병태(崔炳台)는 각 징역 6월, 김정희(金錠熙)·김한룡(金漢龍)은 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기전여학교의 김공순(金恭順)·김나현(金羅賢)·김신희(金信熙)·김인애(金仁愛)·최요한나(崔堯漢羅)·함연춘(咸然春) 등은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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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가람시비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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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3.1운동 기념비(신흥학교)
전주의 3.1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1919년 3월 13일은 전주의 장날이었는데 12시에서 1시 사이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 그리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 날 시장에 왔던 수천 명에서 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3시와 4시경에도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으며, 밤 11시까지도 작은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4일 오후 3시경에 천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하였으며,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40여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기전학교 학생 13명, 기생 4명이 있었다. 전주 3·1운동에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지도한 분은 당시 서문밖 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인전 목사였으며, 그 연락을 맡은 사람이 당시 서문교회 교인이었던 더벅머리 총각의 최종삼 씨였다. 여기에 김인전 목사의 동생인 김가전(당시 중학과정을 마쳤음)과 김종곤 등도 거사 준비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이로는 고형전, 남궁헌,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과 기전의 임영신, 김신희, 강정순, 함연춘, 김순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김경신은 옥사하였고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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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지(신흥학교)
전주의 3.1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흥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안내판이다. 1919년 3월 13일은 전주의 장날이었는데 신흥학교 학생들은 남문시장 부근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 그리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 날 시장에 왔던 수천 명에서 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3시와 4시경에도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으며, 밤 11시까지도 작은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4일 오후 3시경에 천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하였으며,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40여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기전학교 학생 13명, 기생 4명이 있었다. 전주 3·1운동에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지도한 분은 당시 서문밖 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인전 목사였으며, 그 연락을 맡은 사람이 당시 서문교회 교인이었던 더벅머리 총각의 최종삼 씨였다. 여기에 김인전 목사의 동생인 김가전(당시 중학과정을 마쳤음)과 김종곤 등도 거사 준비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이로는 고형전, 남궁헌,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과 기전의 임영신, 김신희, 강정순, 함연춘, 김순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김경신은 옥사하였고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후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흥학교도 태극기와 전단을 준비하여 만세를 부르며 동조시위를 벌였다. 신흥학교는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학교를 열었다. 위와 같은 신흥학교의 항일정신을 기념하고 그 흔적을 널리 알리고자 본 안내판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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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숭고한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으로 상설 전시장과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 270평 규모에 1층에는 좌석 170석의 강당이 마련되어 있고 2층에는 전시실, 3층에는 화실로 이루어져 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개관한 전시실로 혁명 과정을 볼 수 있는 당시의 사진 전시 및 동학혁명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소장물로는 동학혁명 과정의 사진,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와 최시형(崔時亨)의 동상 등 100여 종에 이른다. 그 밖의 주요 시설로는 소극장, 전시장 2개, 영상 아트홀 등이 갖춰져 있다. 동학혁명운동이란 전라도 고부라는 마을에 있던 조병갑이라는 군수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으킨 사건인데 녹두장군 전봉준을 선두로 해 일어난 운동으로 황토현 전투의 승리,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된다. 전주성에서 전주 화약을 맺고 처음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이 처형된 후 이 일이 결국 청일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무장봉기 혹은 무장투쟁으로 불리었으나 현대의 평가에서는3.1운동으로의 계승과 여러 측면으로 보았을 때 근대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기틀 마련에 의의를 둔 사건이라 재평가되며 역사의 큰 사건으로 혁명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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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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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발원지(고부)
고부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을 알리는 비석이다. 고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옛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 이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혁명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