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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추모비
손화중(1861 - 1895)의 자는 화중, 호는 초산, 이칭은 손정식이며, 개항기 삼례지방의 교조신원운동과 관련된 천교도인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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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두 기적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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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동상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전라북도 순창(淳昌) 사람이다. 어려서 전우(田愚)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명치대학(明治大學) 법과와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그후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중앙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에 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유학생의 장학금을 보조했다. 귀국하여 경성법률전문학교 조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내고,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1922년 11월에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여 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해서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회금보관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허헌(許憲)·김태영(金泰榮)·이승우(李升雨)·김용무(金用茂) 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刑事辯護共同硏究會)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운동사건을 무료 변론했으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독립운동자에 대한 사건으로 정의부(正義府)·연통제(聯通制)·광복단(光復團)·김상옥(金相玉) 사건, 3·1운동에 잇달은 각지의 독립만세사건,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운동, 원산노조파업 사건, 조선 공산당 사건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많은 사건의 변호를 담당하였다. 1927년 2월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929년 7월 1일의 전국복대표대회(全國復代表大會)에서 조사부장 겸 회계로 선출되어 활약했으며, 1930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특히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 헌(許憲)·이인(李仁) 등과 함께 구속된 학생을 변호하기 위하여 최대의 성의와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1946년에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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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극단
황극단은 전북 임실 출생으로 호남에서 활동한 의병장인 이석용 의병장이 순국하기 전 대구형무소에서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원영에게 남긴 유언으로 세워진 추모 제단이다. 광복 후 1955년 1월 1일 이원용은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이석용 의병장 순국비, 고종황제비, 대한의장비,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 백범안동김공구지비, 대한장의순국5열사(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기적비, 광복정령33인추억비 등 모두 5기의 비를 세우고 황극단을 세웠다. 황극단은 이원영 지사가 8년 동안의 요강 행상과 전답 2600여 평을 팔아 1955년 5월 5일에 건립하였으나 해당 위치에 현 전북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위치를 옮겨 오늘날의 위치가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진안 마이산 주필대에서 거병하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마근현, 수류산, 관촌역,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2년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그 해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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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일제에 찬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르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4년 7월 21일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234-16(어린이회관동편)에 독립운동추념탑이 건립되었다. 현재 추념탑 부지에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현창비와 탑명비, 헌시비, 건립취지문비, 안중근의사 휘호비, 건립기비 등 부속시설과 함께 추념탑 주변을 공원화하여 청소년들에게는 정신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후손들에게는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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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식 집(전주)
장현식(1896 - 1950)은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재단에 사재를 기부하여 교육을 통해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창간될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4월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의 재정을 담당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고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되어 1950년 10월 24일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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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사당(옥동사)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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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묘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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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련 묘
박태련(1895 - 1950)은 1919년 3월 13일의 전주 장날을 이용하여 이운영(李云泳)·김봉추(金鳳樞)·김진영(金鎭永)·강선칠(姜善七)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기독교·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을 눈치챈 일본 경찰은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일부 주동자를 체포하고 각급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경비망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신흥(新興)·기전(紀全)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고, 천도교측에서도 교구실에서 수천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13일의 만세시위 계획을 연락하였다. 이때 그는 최종삼(崔宗三)·유병민(劉秉敏)·김한순(金漢淳)·함의선(咸義善) 등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등사하였다. 거사 예정일이 다가오자, 시위계획을 미리 눈치챈 일본 경찰·헌병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3월 13일 정오, 기독교도·천도교도·학생이 중심이 된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이 공립 제2보통학교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대화동(大和洞)을 거쳐 우편국까지 시위 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경찰과 우체국 앞에서 대치로 실랑이가 벌여졌다. 이때 시위군중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자, 일제측은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8월 2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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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기념비(서문교회)
김인전(1876 - 1923)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 제4대 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남 서산군 한산 출신으로 1914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내의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인 1914-1919년에 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 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1만여 명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며, 100만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역시 전쟁수행에 충당할 목표하에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여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또한, 인재를 육성할 계획하에 중국 각지의 군사강습소·병공국(兵工局)·학생단(學生團) 등에 파견하여 전문적인 훈련과 강습을 받게 하였다. 그 뒤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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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기념비(전주사범학교)
전북 지역의 항일 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주교육대학교(구 전주사범학교) 내에 건립한 탑이다. 전북 지역의 항일 학생 운동은 1919년 3월 2일부터 군산 영명학교와 임실 오수초등학교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어 1919년 3월 14일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 시위를 계획했다. 일본 교장 관리 아래 경계가 심해지자 김학술, 라명조, 신형식 등이 중심이 돼 학생 70여 명이 동맹해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고, 학교측의 학부모들을 상대로 끈질긴 협박이 이어지자 이남율, 김수남 학생 등은 학교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전북에서는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주여고)와 전주사립기전여학교, 전주사립신흥학교,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군산 멜본딘여학교 등 도내 13개 학교 대표학생들이 연락망을 조직해 맹휴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전북지역 학생 항일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해방 직전인 1945년까지 계속됐다. ‘우리는 뜻대로 일이 안되면 졸업 후 함경도나 평안도로 부임해 만주의 독립운동가와 연결하자’ 등의 강령을 결의한 조영철, 박완근 등 19명이 결성한 ‘우리회’, ‘우리말을 사용하고 일어상용을 배격한다’는 실천요강을 결의해 조직된 ‘석류회’, 일본의 패전으로 전후문제를 처리할 비밀결사 조직 ‘독서회’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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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처형지 곤지산 안내석
김개남(1853 - 1895)의 자는 기선, 기범, 초명은 김영주이며,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동학에는 1890년경에 입도(入道)주1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신앙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힘써 1891년에 접주가 되었다. 같은 해에 동학의 제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으로 호남 지방 접주들과 자주 접촉을 하면서 친교를 맺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부 접주 전봉준(全琫準), 무장 접주 손화중(孫華中), 금구 접주 김덕명(金德明), 주산 접주 최경선(崔景善) 등이었다. 1892년 전라도 삼례(參禮) 지역에서 교조신원운동 당시에도 교도들을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성이 높아져 호남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1893년 보은집회에서 수만의 동학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깃발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을 때, 또다시 호남 교도들을 동원하여 대접주(大接主)주2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위가 성과 없이 끝나고 각지에서 동학 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남접(南接)주3의 강경파 접주들은 독자적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894년 초 전봉준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주도하자,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켜 4월에는 백산(白山)에 동학 운동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총관령(總管領)주4을 맡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주5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 요충지인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진입하였고, 남원 진입 후 적극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인 순창 · 용담 · 금산 · 장수 등지의 동학 조직을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세력권 확대를 시도하였다. 이후로도 계속 남원에 주둔하였고 전라좌도를 관할하면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농민군 해산 후 재봉기를 처음 시도한 대접주도 남원의 김개남이었다. 김개남은 10월경에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임실을 거쳐 전주로 들어왔다. 전주감영에는 신임 인사를 하러 남원부사와 고부군수가 와 있었다. 김개남은 서슴지 않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10월 말에는 예하의 일대 병력을 금산으로 보내서 읍내를 점거하였다. 금산에 들어간 김개남군은 읍내에 호된 보복 행위를 자행하였다. 김개남군은 거쳐 온 군현마다 이러한 지나친 행위로 인해 인심을 잃고 말았다. 이후 11월 들어 북상할 계획을 시도하여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였고, 이튿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청주를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거리를 행군해 온 김개남군은 앞장선 일부가 청주성에 접근하였다가 기습을 당하며 무너졌다. 김개남군은 전라도로 돌아가서 더 이상 대군의 위세를 갖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산하였는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김개남은 결국 체포되고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全州將臺)에서 참수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