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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실 집
박춘실(1875 - 1914)은 개항기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박춘실(朴春實)은 박동식(朴東植)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이 있을 때에 호남 창의 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한 바 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군 천반산, 성수산,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 농수리, 양악, 진도리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을 부장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수비대장 조사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는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순사하였다.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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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추모비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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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유허비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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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불망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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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기념관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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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묘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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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집(죽림정사)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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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산서면)
장수군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산서면을 비롯한 장수군 전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신 수많은 순국선열을 추모하기 위해 1919년 당시 장수군 관내에서 제일 먼저 만세가 있었던 산서면 동화리에 기념비를 1995년 12월 1일에 건립하였다. 장수군 관내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3.5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3.19.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으며, 첫 거사가 좌절된 장수읍에서도 3월 26일 최영식, 신동관,장재만,양일표,빈양섭 등이 주도하여 산서면 오성리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 만세운동 기간 동안 최영석, 신동관, 장재만, 양일표, 빈영섭 등 수십명이 검거되고 옥고를 겪었다. 이렇게 장수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의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이 되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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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원 사당(오산사)
오산사(五山祠)는 구한 말 호남지역의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였던 권중원(權重遠)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권중원(1860 - 1910)은 장수 출신의 의병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은 진규(晉奎)이고 자는 평중(平仲), 호는 청련재(靑蓮齋)이다. 일찍이 서산 김흥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고 전국의 여러학자,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써 남다른 유학적 학문 세게를 이루었다. 외세의 국권침탈이 날로 격화되어 가자, 1885년부터 숙(塾)을 열어 나라의 부강이 곧 교육에 있다는 일념으로 인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권중원은 1905년경부터 1910년에 이르던 시기에 정재 이석용이 전북 진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서로 교유하며 협의 지원하고 이석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거사 직전에는 이석용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석용과 의병에 협조한 여러 사실들이 발각되어 가옥과 전답 서책이 몰수되고 불태워지는 참화를 겪었으며 이후 도피하던 중에 1910년 51세로 순절하였다. 오산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학과 유림 후손들이 석채례를 개최하여 선생을 추모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문집으로는 청련재유집(靑蓮齋遺集)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19년 오산사를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정부는 2019년에 권중원 선생을 대통령 표창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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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신 묘
김동신(1871 - 1933)의 자는 원표, 호는 청암이며,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봉기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留陣)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갔다.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김동신은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에서 기우만(奇宇萬) ·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모아갔다. 이후 9월경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고, 남원 모래사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9월 중순경 용담 내원사(內源寺)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으나, 통수권과 전략 등의 문제로 공격해 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곧 해진하였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처럼 전라도 ·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충청남도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1908년 6월에 체포되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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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주 추모비
박정주(1871 - 1921)의 이명(異名)은 박화용(朴和容)이다. 어려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고, 1919년 당시 고향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초순 이후 서울과 전주(全州)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山西面) 동화리(桐花里) 장날을 기회로 삼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시장으로 갔다. 오후 3시경 미리 준비한 태극기 2개를 장대에 매달아 앞세우고 시장 중앙으로 나가 정호현(丁豪鉉)와 정봉수(丁奉洙)에게 전달하여 받들게 하였다.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날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연호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 행진을 벌이던 도중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동화 헌병주재소로 끌려갔다. 이에 흥분한 김형택(金炯澤) 등 약 200명의 군중들이 헌병주재소로 몰려와 석방을 요구하였다. 기세에 압도당한 일제 헌병이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석방하였다. 다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산서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산서면으로나 조선인으로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매우 유쾌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해산하였다. 이후 이날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붙잡혀 모진 조사를 받았다. 1919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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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추모비
김개남(金開南, 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3일)은 1894년 동학 농민 선언의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전봉준, 손화중과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족보에 실린 이름은 영주(永疇), 어릴적 이름은 기선(琪先), 성인이 되어 기범(箕範),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동학에 입도한 후 동학의 교리에 따라 태평천국으로 밝은 이상적인 나라를 남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호를 개남(開南)으로 정했다. 동학농민혁명기에는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금구,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무주, 진안, 용담, 장수, 순천, 낙안, 고흥 등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또한 김개남은 휘하의 김인배로 하여금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게 하여 하동,진주 등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제2차 봉기 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병영이 있던 청주로,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은 나주로 진격하였다. 김개남은 11월 10일 청주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 간 효시(梟示)되었다. 향년 4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