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372건
-
오의균 묘
오의균(1883 ~ 1957)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내 독립운동단체들 가운데 하나인 감독부(監督府)의 부감독(副監督) 직책을 맡아, 감독인 노진룡(魯鎭龍)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인원 파송 및 군자금 모금, 밀송 등의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펴 나갔다. 1927년 1월에는 농촌개발과 문명퇴치를 목적으로 최정익(崔正益)·여운홍(呂運弘) 등 10여 명의 발기에 의해 창립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의 전라북도 대표 겸 이사(理事)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전봉준 집(고창)
전봉준 장군 생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1855년 12월 3일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자랐던 곳이다. 위치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이며 당시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모두 소실되었다.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지석
이 곳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1888년경 대접주 손화중과 근동에 세거해 온 천안 전씨 종친들과 연루된 전봉준 장군은 동지를 규합 이곳 당산골에서 농민군을 양성해오던 차 1894년 1월 10일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고부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마침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밝히는 무장포고문을 발표, 흥덕을 거쳐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25일 백산성에 총집결하는 대장정을 이른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갑오농민혁명의 제 1차 봉기가 일어난 발상지인 이 곳 고창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 곳에서 창의 포고문이 발표되었으며, 기념탑은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 혁명의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하였으며, 포고문을 선포하는 모습을 담아내었다. 탑 본문에는 기의의 목적을 담아낸 포고문을 새겼다. 이 기념탑은 2002년 고창군 및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건립하였다.
-
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은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인 이 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 고창의 손화중 (남접) 대접주는 이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 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 10일 공음년 구수내 송문수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 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時機尙早)를 말하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 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고부 농민봉기 이후 전봉준은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都率大將)으로 한 농민군은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등을 띄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
고창주 추모비
고창주(1858~189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 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1894년 당시 아들 고광철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장성 황룡촌, 전주성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2차 농민봉기에도 참가했다 전봉준 및 손화중 등의 농민군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 압송되었는데, 1895년 3월 재판을 받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중 정읍에서 지방 유지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금 체포된 뒤 3월 27일 총살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1994년 5월 고창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 의해 동학 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세워졌으며, 고창주 의병장을 기리고 있다.
-
고창무장동학농민혁명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기포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1894년 3월 20일경에 재봉기하면서 밝힌 무장포고문에는 봉기의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 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의병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동학농민군 진격로(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를 따라 세워진 안내판으로 <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라도 무장현(현 고창) 선운산 도솔암 남쪽에 충암절벽의 불상 속에 비결이 들어있고,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동학 손화중의 접중에서 이 비기를 손에 넣어 사람을 끌어모으고 농민혁명을 일으켰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
-
동학농민군 진격로(전봉준 장군 유시)
이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에는 전봉준 장군 유시(遺詩)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봉준 장군은 공주 우금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뒤 논산, 구미란, 그리고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동지 몇명과 함께 11월 29일 (갑오년) 입암산성 (정읍시 입암면)으로 들어가 밤을 지새고, 다음날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지난날 친구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 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로 이웃에 살고있는 한신현에게 밀고했고,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뜻하지 않은 위기에 놓이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몽둥이로 다리를 얻어 맞고 붙잡히고 만다. 전봉준에겐 이미 현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1895년 (을미년) 3월 10일 등 5차례에 걸쳐 일본영사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에 "나는 바른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역율(逆律: 반역죄)을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결국 1895년 3월 29일 사형선고를 받고,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다음날인 3월 30일 새벽 2시 교형(刑)이 집행되었다.
-
정창묵 의적비
정창묵(1884 ~ 1961)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38년 4월부터 정읍(井邑)을 활동무대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담하여,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인동맹은 보천교도(普天敎徒)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일제패망을 기원하는 한편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를 결의하고 대원 50여명으로 조(組)를 편성하여 경찰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정창묵은 신인동맹 설립초기부터 활동하며 동지들 규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그런데 1940년 12월 경, 비밀결사 신인동맹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들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주도자도 검거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춘산리 비석군(애국지사 유혼추도비 외)
춘산리 비석군은 국도 23호선 영광으로 가는 방향에서 지석리로 갈라지는 도로 서쪽에 세워진 비석 10기를 말한다. 대산면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공적비를 한 곳에 모은 것이며 공덕비 2기, 불망비 3기, 선정비 1기, 추모비 2기, 기념비 1기 등으로 총 10기가 세워져 있다. 그 중 독립지사를 위한 비석은 의사 김공 영수 추모비와 건립성취록, 고 애국지사 유혼 추도비가 있으며 그 외에도 진주 정규묵 공덕비, 전 참봉 정규원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철환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상구 진휼비, 전 면장 여주 이공 병섭 추모비, 면장 황판규 기념비 등이 건립되어있다.
-
김영수 추모비
김영수(1914-1944)는 1940년 2월 17일 전북 정읍(井邑)에서 구국결사단(救國決死團)을 조직하고, 4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김제(金堤)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헌병대와 경찰서를 습격·멸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