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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창 묘
박준창(1890 - 1962)은 1919년 3월 16·17일에 걸쳐, 정필조(鄭弼朝) 등과 청웅면 남산리(靑雄面南山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정필조 등 마을 유지들과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6일 오후 9시경, 남산리 뒤 들판에서 1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에도 계속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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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제 구 묘
조희제(1873 - 1939)의 자는 운경, 호는 염재이며, 일제강점기 『염재문집초고』를 저술한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대성하였다. 그 뒤 우국지사 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김병주(金炳周) 등과 도의로 교유하면서 격변하는 시국에 대하여 강개(慷慨)한 뜻을 품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한말 사변의 전말과 또는 절의(節義)를 세운 의열사(義烈士)·의병들의 실적(實蹟)과 문헌을 수집,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편찬하였다. 평생 정력을 다하여 집필한 그 비사(秘史)가 1938년 11월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임실경찰서에서 10여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당시 그 『염재야록』에 서문을 쓴 최병심, 발문을 쓴 이병은, 교정을 본 김영한(金寗漢), 서역을 맡은 조현수(趙顯洙) 이외에 많은 가담인사들까지도 모두 구속되는 한편, 본인 및 그 아버지의 문집초고 등도 모조리 압수당하였다. 울분이 쌓여 병이 나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또 체발(剃髮)을 강요당하자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차히 사는 것보다는 차리리 대의를 지켜 죽음을 맹세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효행이 독실하였다. 저서로는 『염재문집초고(念齋文集草稿)』 8권이 있었으나 압수되었고 편저로는 『염재야록』 6권 2책이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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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유허비
최창렬(1875 - 1940)은 1912년 이석용(李錫庸)이 의병 활동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이석용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鎭安)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9월 12일 밤 전북 고창(高敞)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이석용은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의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와 합세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였다. 그 후 이석용은 1912년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고 의병의 재기를 준비하였다. 그 단원은 곡성(谷城)의 유인수(柳寅秀), 안자정(安子精),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등과 남원(南原)의 김경호(金景浩), 김인식(金仁植), 허간(許幹), 허주(許柱), 허업(許業), 조성민(趙成珉), 김학수(金學洙) 등이었다. 이 비밀결사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치는 않았으나 모병(募兵)을 비롯하여 무기·군자금·군수품 등을 보급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최창렬은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단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군수품을 보급하여 이석용의 의병 활동을 후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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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집
최창렬(1875 - 1940)은 1912년 이석용(李錫庸)이 의병 활동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석용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鎭安)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9월 12일 밤 전북 고창(高敞)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이석용은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의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와 합세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였다. 그 후 이석용은 1912년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고 의병의 재기를 준비하였다. 그 단원은 곡성(谷城)의 유인수(柳寅秀), 안자정(安子精),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등과 남원(南原)의 김경호(金景浩), 김인식(金仁植), 허간(許幹), 허주(許柱), 허업(許業), 조성민(趙成珉), 김학수(金學洙) 등이었다. 이 비밀결사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치는 않았으나 모병(募兵)을 비롯하여 무기·군자금·군수품 등을 보급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최창렬은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단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군수품을 보급하여 이석용의 의병 활동을 후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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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유허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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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집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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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묘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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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의사 묘
28의사의 묘는 이석용 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하던 28명의 의사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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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충효정려비
이원영(1899 - 1983)은 1912년 호남창의군(湖南倡義軍)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장남으로 부친의 의병활동에 비밀문서와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으며, 1913년 겨울 부친이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붙잡히자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부친의 옥고를 뒷바라지하였다.그후 1939년 4월 4일 부친의 출생지인 전북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삼봉리(三峰里) 부락 뒷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금지되어 있는 소위 형사자(刑死者)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친부의 항일독립정신을 후세에 전승케하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형사자분묘제초상(刑死者墳墓祭肖像)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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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유허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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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전적의혼추모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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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정 정사기적비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인 이웅재의 선조인 춘성정 이담손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처음 지은 주택이다. 해당 집은 1977년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종가에 위치한 춘성정 정사 기적비는 둔덕이씨 가문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춘성정 정사 기적비에 각명된 애국지사는 총 16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