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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출신 8명 항일 영광정
영광정(迎狂亭)은 이 지방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원중이 7인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21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산6 번지에 건립한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김원중은 애국동지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의병투쟁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 마치 미친 사람행세를 하여 왜인들의 감시를 피했다고 하여 영광정(迎狂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처마 끝에는 태극팔괘를 새겨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 6·25전쟁 때 현판이 분실되었을 뿐 그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일부 기둥과 현판을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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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숙 묘
양윤숙(1875 - 1910)은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호남의군부의 도총독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별명은 양인영(楊寅泳)·양춘영(楊春泳). 자는 윤숙(允淑). 호는 춘계(春溪). 양석민(楊錫民)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이 전국에 구국 의거(救國義擧)를 호소하며 호남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이끌고 정읍, 내장을 거쳐 순창에 이르자, 채영찬(蔡永贊)·김갑술(金甲述) 등과 함께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임병찬의 의병진이 순창에서 무너지고 의병장들이 대마도에 억류되자,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회문산(回文山)을 근거지로 하여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장(通狀)과 격문을 발송, 동지 120명을 규합하고 호남의군부(湖南義軍府)의 도총독이 되었다.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林洵豪),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으로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8월 의병들을 총칼로 무장시켜 서기협으로 하여금 의병 22명을 이끌고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120명과 교전하게 하였다. 또한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뒤 이국찬에게 12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순창군 서면에서 일본군을 교란시키게 하였으며, 한자선에게는 3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 해 11월에는 최산흥에게 50∼60명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임실군의 일본군 막사를 불태워 버렸다. 1909년 1월 일본 헌병대·일본군 수비기마대·일경 주재소 등을 한밤중에 습격, 방화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그 해 4월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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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묘
기우만(1846 - 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전라남도 장성 출신. 참봉 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고종 32)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고종 33)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 봉기의 기운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1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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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구 구국비
장병구(1897 - 1983)는 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1922년 5월 21일 전북 전주군(全州郡) 운동하면(雲東下面) 금당리(金塘里)에서 김영한(金永翰)·김익환(金益煥)·문병래(文柄來)·김덕칠(金德七)·김명섭(金明燮)·서보국(徐寶局) 등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하여 금당리 산중(山中)에 있는 서정관(徐政官)의 빈집에 인쇄기계와 석판(石版) 등을 설치, 조선은행발행(朝鮮銀行發行) 1원권 40,000여 매와 50전 지폐 3,000여매를 인쇄한 것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2년 12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통화위조(通貨僞造)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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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추념탑
전북 완주군 경천면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은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1994년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 추념탑, 현충문 등을 건립하며 조성이 완료됐다. 독립운동추념탑은 글귀가 새겨진 두 개의 바위와 둥근 기둥, 반구 형태의 조형물로 이뤄져 있는데 바위 위로 각각 ‘민족의 얼’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노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형물의 둥근 기둥의 가장 윗부분, 활시위에 해당하는 부분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상으로 독립을 향한 우리 선열들의 기백과 강열한 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추념탑 이면에는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 28인의 명판과 독립선언문, 추념탑 설립 취지 등이 함께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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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구의사사적비
1982년 5월 건립하였고, 국가보훈처에서 2003년 9월 15일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는 시설이다. 9의사는 유중화, 유현석, 유영석, 유준석, 유태석, 유명석, 유연청, 유연풍, 유연봉의 9인이다. 이들이 처음 거병한 데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시작된 최익현, 임병찬 장군의 의병활동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유치복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같은 지역의 유지명, 송태식 등과 친족 8인과 함께 1907년 의병을 조직하였다.이들 의병장은 비봉면 소농리에 병기 제작소를 두고 고산, 익산, 여산, 진안, 금산, 연산까지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1910년 10월 유치복 선생이 체포되고 나머지 8 의사들도 1916년 체포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유치복 선생은 총살을 당하였고 나머지 8명의 의사는 최소 10년의 형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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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봉기비
1892년 10월 17일경 동학교단은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하여 공주에서 교조의 신원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여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금지 등을 요구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최시형이 교도들을 삼례에 집결시켰다. 공주 집회 때와 유사한 요구를 했지만 이 집회를 통해 전봉준이 동학교단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삼례집회에서 소장(訴狀)을 작성한 것은 서병학(徐丙鶴)이었고 ‘괴수’는 서인주(徐仁周)였다. 서병학에 의해 소장이 작성되기는 했으나, 탄압이 두려워 소장을 고정(告呈)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자원해서 나선 인물이 바로 우도(右道)의 전봉준과 좌도의 유태홍(柳泰洪)이었다.이후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농민군은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9월 초순경 대원군측의 밀사와 접촉하여 중앙정국의 현황과 청일전쟁의 귀추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한 전봉준은 9월 10일 무렵부터 제2차 기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삼례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 삼례는 백여 호도 안 되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었고 다수의 농민군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저막(邸幕)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5, 6일 후에는 직접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로 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9월 9일에는 전라도 금구의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다음 날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 쪽으로 향하였다.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였고, 13일 밤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갔다. 14일에는 삼례에 모여 있던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을 무기를 탈취해갔고, 16일에는 백여 명의 농민군이 위봉산성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갔다. 또 8월 말부터 남원에서 재기포 준비를 김개남도 이 무렵 인근 읍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았고, 9월 26일에는 손화중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결집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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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출진상
전봉준이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제2차 봉기를 준비한 곳이다. 1894년 10월의 삼례농민봉기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선 반일항전의 출진(出陣)이었다. 일본군의 국권침탈만행에 일어선 10만여 동학농민혁명은 주적을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고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이곳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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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봉 공적비
김판봉(1901 - 미상)은 김판봉은 1936년 음력 12월경 전북 익산에서 정해도(鄭海桃)를 교주로 하는 황극교(黃極敎)에 가입하여, 표면적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판봉은 황극교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임을 알고 은세룡(殷世龍)의 권유로 가입한 후 전북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4월경 이간상(李旰相), 김경록(金京錄) 등 20여 명을 입교시키고 김경록의 집에서 수명의 교도들에게 교세확장과 조선독립을 설파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판봉은 1940년 10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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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최대의 민중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기에 그 흔적이 대둔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둔산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894년 2차 봉기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력이 삼례를 출발하여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였다.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관군.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70여일 간 항전하던 농민군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24)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대둔산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역사적 현장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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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의 묘
이재환(1889 - 1951)은 일제강점기 광복회, 주비단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활동 등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살다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주진수(朱鎭守)·우이견(禹利見) 등이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고, 1917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우이견·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권영만(權寧萬) 등과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결의하고, 불응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여 각지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에 자금을 거두어 소진형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집금원(集金員)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심영택(沈永澤)·안종운·장응규(張應奎)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주비단(籌備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같은해 12월 강경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1921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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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갑 추모비
홍순갑(1896 - 1929)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민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이상재(李商在) 지도 아래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민정부(民政部) 중앙집행위원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9년 3월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