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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 1독립운동추모비
1919년 3월 1일에 펼쳐진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비석의 뒷면에는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최인,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이종일, 나인협, 홍기조,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박준승, 김완규, 양한묵, 이인환, 박희도, 최성모,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이갑성, 김창준, 이필주, 오화영, 정춘수, 신석구, 박동완, 김병조, 유여대, 한용운, 백용성의 이름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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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병 묘
김기병(1831 - 1895)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탄생,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고 국내적으로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 앞들에서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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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줄포 세고 터)
줄포는 서족으로 칠산바다, 동쪽으로 고부평야, 그리고 북쪽으로 변산반도를 끼고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를 갖추고 있으며, 무장과 흥덕에서 고부와 한양으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로 인해 서해안 일대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로 고려시대에는 안흥창(安興倉), 조선시대에는 고부군 서창(西倉) 또는 부안헌의 남창(南倉)이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 줄포는 제주도에서 진도, 법성포, 줄포로, 군산포를 거쳐 한양의 마포나루로 이어지는 서남해 연안 항로를 연결하는 경제활동의 중심 항구였다. 일본강점기에는 전북지역에서 생산한 쌀의 일본 수출 항구로 가능하며, 서해의 4대 항구(제물포, 군산, 줄포, 목포)로 성황을 이루었다. 고부봉기 이후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던 지도부는 1894년 3월 1일[양력 4. 6], 줄포 세고를 점령한 뒤 군량(軍糧)을 확보하였고, 3월 10일에는 인근의 사냥꾼에게서 총기(銃器)를 거두어 들였다. 고부를 떠나 무장으로 이동한 후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이 고창과 흥덕을 거쳐 3월 23일[양력 4. 28] 줄포 사정(射亭)에 와서 머무른 후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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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집강소)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동학농민군이 머물며 자치를 실현한 부안 도소(道所)였다. 도소는 집강소(執綱所) 또는 도회소(都會所)라고도 한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최초로 쟁쥐한 민관 협치(協治) 기구로 평가받는다. 1894년 7월 6일(양력 8월 6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이 합의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동학농민군이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며 자치(自治)를 실현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설치한 지역, 동학농민군과 관(官)이 공존한 지역, 보수적인 유생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항한 지역 등으로 나뉜다. 부안 도소는 부안 현감을 비롯한 지역민의 요청에 따라 김낙철(金洛喆) 대접주 등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부안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부안 도소로 사용한 신원재는 부안에 세거하는 신씨의 중시조 덕무공(德武公)을 모시는 덕무공파의 종중 재각이다. 재각 뒤편은 신씨 선산이 있는 고성산(古城山)이다.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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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묘
임병찬(1851 - 1916)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주1 · 군량 · 연병(鍊兵)주2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 · 정읍 · 순창 · 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주3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 · 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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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피체지
임병찬(1851 - 1916)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주1 · 군량 · 연병(鍊兵)주2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 · 정읍 · 순창 · 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주3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 · 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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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 유허비
설진영(1869 - 1940)은 일제강점기 『남파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通政) 설상기(薛相基)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최덕순(崔德淳)의 딸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전라북도 진안 이산묘영광사(駬山廟永光祠)에 충의열사 33인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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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 서실
설진영(1869 - 1940)은 일제강점기 『남파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通政) 설상기(薛相基)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최덕순(崔德淳)의 딸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전라북도 진안 이산묘영광사(駬山廟永光祠)에 충의열사 33인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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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두 추모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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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집(생가)
김병로(1998 - 1964)의 호는 가인이며,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유년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1906년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許憲) · 김용무(金用茂) · 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 · 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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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병 항일의적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일본군과 전주에서 파견된 시위대에 맞서 격전을 벌이고, 면암 최익현선생이 항일의병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히 현장이다.순창 항일의병 의적비는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진 을사늑약에 항거해 이듬해인 1906년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 의병장 등 13인의 의사가 의병 투쟁을 결의, 순창객사에서 체포된 역사적 의미를 기려 지난 1985년 세위진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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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피체유적비(녹두장군 전봉준관)
전봉준(1855 - 1895)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 유적지는 2005년 5월에 복원한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이다. 전봉준 장군이 붙잡혔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시설로 당시 부엌, 방, 봉당, 가구,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부속채로는 주막의 헛간, 창고를 재현해 놓았으며, 농기구 등을 함께 전시하여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