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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 3.1운동발상지 기념 전일봉 동상
전일봉(1896 - 1950)은 전북 무주(茂朱) 사람이다.1919년 4월 1일 무주군 무주읍(茂朱邑)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이곳 무주에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인근의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3월 7일경이었다. 이에 이곳 인사들은 다른 지방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군민들간의 연락을 통해 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다.이때 전일봉은 인근의 기독교도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해 갔으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무주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일로 정하는 한편, 읍내보통학교 학생들과 뜻을 같이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거사 일인 4월 1일 오후 2시경, 40∼50여 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우고 집합한 다음, 전일봉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주위의 장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헌병 분견소의 무장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들 시위군중을 해산시켜 버렸다. 이때 전일봉과 보통학교 학생 3명이 붙잡혔으나, 그날 밤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전일봉은 이 일로 이해 4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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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권 묘
박병권(1907 - 1942)은 박병권은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고등과 2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28년 1월 28일부터 1929년 1월 25일까지 부안군 동진면(動津面)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경부터 최옥환(崔玉煥), 최순환(崔順煥) 등과 함께 신사상 연구를 시작하고 1931년 음력 10월 경부터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堂上里)에서 모여 회의한 결과 1927년부터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전해져 오는 위친계(爲親契)를 바탕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2월 말 명칭을 당상리저축조합(貯蓄組合)으로 하고, 최상기(崔相基) 등 위친계원 31명의 찬성을 얻어 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농민의 권익보호와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이로 인해 박병권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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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환 묘
최순환(1912 - 1950)은 최순환은 1926년 3월 부안공립보통학교(扶安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경성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자퇴하고 최옥환(崔玉煥),박병권(朴炳權)과 함께 신사상연구를 시작하였다. 최순환과 동지들은 1931년 음력 10월경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에 조직된 '위친계(爲親契)'라는 조직을 '농민조합'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당상리 저축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최순환은 동(同) 조합의 서기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약 1년 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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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구 묘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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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추모비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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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산)
부안 백산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을 가르는 대사건으로 평가받는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은 1893년 11울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고, 이듬해(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 이후 무장기포를 거쳐 1894년 3월 26일(양력 5월 1일), 호남일대에서 모인 구눙이 야트막한 백산에 집결하였다. 그 수는 전라도 34개 지역에서 모인 8천여 명으로 전하는데, 이를 두고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이라고 하였다. 백산에 모인 군중은 지휘부를 비롯한 혁명군을 조직하고, 봉기의 대의와 지향하는 바를 밝힌 '백산 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군율'을 선포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백산을 택한것은 '백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라는 비결이 전하는 길지라는 점, 군량확보가 용이한 곡창지대라는 점, 전략적 용충지일 뿐 아니라 사통팔당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1894년 당시 고부 백산이 1914년 일본강점기에 부안 백산이 되면서 한때 백산대회는 잊혔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기념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9월 17일 국가문화재 사적 제409호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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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조선 시대 공개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집행하였다. 중한죄를 지으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하는 것[不待時斬]'과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한다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부안에서의 공개 처형은 부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 즉 부안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라 부르는 남문 밖이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으로, 1894년 12월 29일(음력) 정부군의 총살로 순국하였다. 이듬해(1895) 1월 12일에는 주산면 홍해 마을의 박문표(朴文表), 도산 마을의 김봉보(金奉甫), 그리고 송성구(宋成九)가 남문 밖에서 순국하였다. 한 달 뒤 2월 12일에는 남문 밖에서 9명이 순국하였고, 열흘 뒤 22일에는 7명이 순국하였는데, 장소는 무론 이름마저 알 수 없다.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던 김석윤(金錫允.김영조)이 순국한 것은 3월 18일이지만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순국한 부안 사람으로 확인된 숫자는 22명이지만,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명은 신원조차 알 수 없다. 12명의 순국 장소는 남문 밖으로 전하지만, 이외는 장소마저 알 수 없다. 이와 함께 부안 읍성의 동문 밖에서도 처형이 자행되었으며, 전남 나주로 끌려간 30여 명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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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관아 터)
조선 시대 부안 관아는 현감이 사무를 보는 동헌[東軒.패훈당(佩訓堂)]이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에, 그 서쪽에는 현감의 숙소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관아 출입문으로 2층의 진석루(鎭石樓)가 있었고, 그 앞 좌측 너럭바위에 <주림옥천(珠林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의 여덟 글자가 새겨 있었다. 지금의 부안군청 자리에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부르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 백산대회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부안읍 모산리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합류하여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먼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라 감영에서 부안 현감에게 지시하여 모집한 장정(壯丁)들을 해산시켰다. 그 뒤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 관아에 머물렀으며, 관아 뒤편에 있는 성황산에 주둔하였다. 부안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4월 7일[양력 5.11] 황토현 전투의 주력군으로 참여하여 승리하였고, 황토현 전승일은 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관아는 동학농민군과 관원이 공존하며 질서를 유지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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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첫 집결지)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민중은 3월 20일에 무장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확대한 후 3월 23일에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3월 26일(양력 5월 1일)에 백산대회를 개최하여 지휘부와 혁명군을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였다.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이곳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분토동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내걸었으며,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 고을 이름을 쓴 작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부안 관아에 편지를 보내 시장(市場)에서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分錢收稅]하는 것을 금지할 것 등 4개 조의 고치기 힘든 폐단[弊瘼]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전라 감영으로 보내기 위해서 부안현에서 모은 장정(壯丁)을 해산시키며 "지금 이들 장정을 모은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에 종사하라."라고 하였다. 일부는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처럼 분토동과 분포재는 부안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집결한 역사의 현장이다. 부안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한 이곳 분토동은 부안김씨 직장공파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분포재는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은 김보칠(金甫漆)의 재실이다. 편액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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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송덕비
이승호(1890 - 1966)는 전북 부안(扶安) 사람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며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폈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요원인 이완식(李完植)·김진억(金鎭億)·이문용(李文庸)·이영필(李永弼) 등이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독립군자금을 요구하자 이에 적극 호응하여 600원을 지원하였다. 그후 서울 익선동(益善洞)에 은닉해 있던 이완식·이문용 등에게 총 3,600원에 달하는 막대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차로 군자금 모집요원인 부안의 자택으로 방문하였을 때인 1920년 11월 600원을 제공하였고, 1921년 1월에 각각 200원, 1,800원과 1921년 5월에 1,000원을 제공하여 총 3,600원을 희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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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김낙철과 쟁갈마을)
부안 동학의 대접주이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였던 김낙철(金洛喆)의 본관은 부안, 자는 여중(汝仲), 도호는 용암(龍庵)이다. 1858년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쟁갈 마을에서 태어났다. 쟁갈 마을은 안쟁가리.용성리.새멀,송학동 등 4개로 형성되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십 명의 하인을 거느린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동생 낙봉과 함께 1890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의 포교로 부안의 동학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김낙철은 1893년 교조 최제우의 사면복권과 동학을 공인받으려는 교조신원운동으로 전개된 광화문 복합 상소와 보은집회 당시, 전라도 책임자로 도도집(都都執)을 맡았다. 고부봉기 이후에는 도소를 설치하여 부안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도민이 부안에서 식량을 구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아사(餓死)를 면하게 되었다. 김낙철은 2차 봉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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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선 기적비
김낙선(1881 - 1925)은 대한제국기 이용서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김낙진(金洛振). 전라북도 부안 출신이다. 1909년 의병장 이용서(李用西)의 부대에 가담하여 총기 15정 등으로 무장한 의병 30여 명과 함께 고부·부안·태인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일본군 기병대의 습격으로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집에서 치료를 받은 뒤, 8월에 다시 이용서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총기 8정 등으로 무장한 부하 12명을 지휘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를 이동하며 활약하었다. 그러다가 김제에서 일본 헌병에 붙잡혀, 같은 해 11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