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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추모비
「항일 독립만세 운동 순국 추모비」를 건립한 이유는 1919년 4월 4일 항일독립 만세운동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방양규, 방진형, 방극용, 방명숙, 방제환 다섯 분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뜻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주생면 출신 5열사는 1919년 4월4일 항일독립 만세운동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순직했다. 5열사는 방양규, 방진형, 방극용, 방명숙, 방제환 다섯 분이다. 5열사는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가 전국에 메아리 칠 때 4월4일 장날을 기해 남원, 순창, 임실 등지에 사는 수천명의 군중들이 광한루 광장과 북부시장터(구남원역전 앞) 등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5열사는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현장에서 여덟 분의 열사가 순절하셨다. 이날 순절자 중 다섯 분의 열사가 남양 방씨 가문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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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동학농민군 유적지 광한루원 표지석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나목은 성밖시장(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조 수은 최제우선생이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룡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 된 시초다. 서형칠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과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자거리에서 참살당하였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때 천도교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실패한 뒤, 덕과면장 이석기가 주도한 3월3일 동해골과 계명당고개 만세운동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장날 성밖시장(현 광한루원)에 모인 군민들이 대대적으로 만세를 부르며 오작교를 거쳐 남원부관아를 향하며 성안시장(현 남원교육문화회관) 군민들과 합류하려다가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잡혀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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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풍 불망비
김시풍(미상 - 1894)은 개항기 전주감영영장을 역임한 무신이다. 전라북도 전주 출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60세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으로 전주감영의 영장(營將)으로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洪啓薰)이 5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의논, 전주성내에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 등과 같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15일 목이 잘려, 16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金永培)·김용하(金用夏)·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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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 관아 터
남원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1861년 경주로부터 피신해 오시어 교룡산의 은적암에 약 반년 동안 은거하시며 논학문(일명 동학론)등 동경대전의 주요 경전을 집필하시며 포교하셨던 동학의 성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장군이 음력 6월 하순에 무혈입성하여 북으로는 금산, 진산에서 부터 남으로는 순천, 광양까지를 관장하는 전라좌도 대도회소와 전라좌도 대집강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관장했는데 그 자리가 여기 남원부 관아 터이다. 7월 중순에는 7만여명의 농민군이 운집하여 남원대회를 열었으며 김개남장군이 정병을 이끌고 북상한 뒤에 남은 농민군이 운봉을 공격하려다가 방아치전투에서 수천 명이 순절하였고 이어서 남원성전투에서 민보군에게 패전하여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후 일본군이 진주아여 많은 백성을 살상하고 방화하는 참상을 겪었으나 살아남은 농님군은 신간회, 3.1운동 등의 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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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의병장사 상
황대연, 이병렬, 이종성 의병장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고자 건립했다.황대연(1876 - 1908)은 1905년 을사조약 늑결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사재(私財)로 총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소모(召募)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수년동안 일군과 항전하였다.그 뒤 1908년 2월 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종환(劉鍾煥)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포대장(砲大將)이 되어 장수(長水)·무주·함양(咸陽)·안의(安義)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3월 23일 무풍면(茂豊面) 지성리(池城里)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이종성(1871 - 1910)은 1908년 의병장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입대하여 무주·함양(咸陽)·안의(安義)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영남·호남·호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2월 18일 60여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서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전한다.1909년 5월 8일 남원군 이문성(南原郡 里文城)의 동북쪽에서 백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 헌병과 교전하였으며 8월 중순에는 의병장 문태서와 함께 충북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지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0월 30일에는 경부선 이원역(京釜線 伊院驛)을 습격·방화하고, 일본군인 3명을 납치하였다. 11월 무주를 근거로 하여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1910년 4월 18일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부락 흑석산(茂豊面 縣內里 文坪部落 黑石山)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과 함께 암중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습격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접전 중 전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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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묘
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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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표충비
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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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동상
강무경(1878 - 1910)은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 체결 후 심남일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 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 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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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양방매 부부사적비
강무경(1878 - 1910)은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 체결 후 심남일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 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 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양방매(1890 - 1986)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姜武景)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에는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영암군 금정면(金井面)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다. 양덕관은 양방매의 친아버지였고 큰 오빠였던 양성일(梁成一)도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방매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長興)·보성(寶城)·강진(康津)·해남(海南)·광양(光陽)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南平) 월교리(月橋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大峙)·대항봉(大巷峰)·월임치(月任峙)·덕룡산(德龍山)·병암치(屛岩峙)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 남평의 거성동(巨聲洞)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여기에 직접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해오자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강무경은 1910년 10월 4일 심남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양방매는 어린 여성의 몸이었기에 석방될 수 있었다.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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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순국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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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집
강무경(1878 - 1909)은 전라북도 무장 출신으로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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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사지
덕유산과 적상산 등 높고 험한 산이 많은 무주지역은 예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구국항쟁을 벌이던 의병들의 요람이었다. 특히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이 강제된 뒤부터 전북 동북부를 무대로 활발히 전개된 중기의병과 후기의병의 대부분은 덕유산 자락의 계곡과 사찰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박춘실 등이 이끄는 의병이 1908~1909년 원통사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특히 1908년 4월 13일 오전 10시경 적의 기습 공격을 당하여 신명선을 비롯한 의병 수십 명이 희생된 곳이 바로 원통사 인근이었다. 원통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자 기존의 절터는 그대로 남겨두고 현재의 가람은 1976년 이후 차례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