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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음원 표지석
독립 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표지판의 내용으로서는 여기 이곳은 남원지역 출식으로 항일운동 헌신하다 순열한 독립 운동가 10인의 추모비가 세워진 곳이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다 1907년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원읍에서 왜군들을 기습공격하다 순열한 양한규 선생과 그 휘하에서 활동했던 진사 박재홍,참봉 양문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의적비, 남원,구례,곡성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전규문 선생, 독립운동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대한 국민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한 박기영, 박권영선생 1919년 4월4일(장날) 남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적군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 순열한 정한일, 황찬서 선생, 1929년 야학을 세워 문명퇴치 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고취에 앞장 선 이두석 선생의 추모비이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을 규탄하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순열의사 정암 이태현선생의 추모비등이 세워져 독립 유공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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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우 항일운동의적비
이태우(1867 - 1923)는 전북 임실(任實) 사람이다.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날에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김영필(金永弼)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오수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주동자 이기송·김영필 등이 일경에 구속되자 2,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기송 등을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일경에 붙잡혔다.같은 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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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극용 기적비
방극용(미상 - 1919)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형갑수(邢甲洙)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일으켰다. 그는 이날 정오경, 광한루(廣寒樓) 광장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일군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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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표지석
이곳은 집강소 시기 남원대회 및 군사훈련지이다. 전주성 점령 후 김개남은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돌아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농민군에 대한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때 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이곳에서 ‘남원대회’를 개최하였다.남원대회 이후 김개남은 7월 17일경 100여 명의 정예농민군만 거느리고 임실 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으며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올 때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의 농민군과 함께 왔으며 이때 숫자가 무려 7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개남은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요천변에서 훈련을 하며 재기포를 준비하고 10월 14일에 5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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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 묘
이태현(1907 - 1942)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호남 유학(儒學)의 거두 간재(艮齋) 전 우(田愚) 계열인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생으로 한학과 유학에 정통하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높은 유학자로서 1932년 흠재의 문인들과 함께 경앙계(景仰 )를 조직하였다. 그를 비롯한 경앙계의 계원들은 일제가 강요하던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정오묵도(正午默禱) 거부, 삭발 거부, 일장기게양 거부운동을 주도하며 동포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2년까지 이와 같은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1942년 5월 23일 남원에 소재한 주생(周生) 순사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죄악을 폭로·규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그 자리에서 자결·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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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 표지석
유치는 유치재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남원과 운봉의 사이에 있는 고남산의 봉우리다. 집강소 통치기 동안 남원에 머물렀던 김개남 부대가 청주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남원에 남아있던 동학농민군은 운봉의 민보군을 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남원의 농민군 지도자 김홍기, 유복남, 남응삼, 유태홍 등은 11월 13일 전라좌도에서 모인 농민군들을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쳤다. 어느 쪽으로 공격해 갈 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원치로 향하는 깃대바위에 부대기를 꽂아놓고 승리를 다짐하였다. 전투는 11월 14일 새벽 4시경 시작되었다.농민군들의 공격 낌새를 눈치 챈 운봉 수성군은 14일 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박봉양은 민보군의 절반을 이끌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선제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이다가 후퇴하여 산상, 곧 방아치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역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한 후였다.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을 중심으로 남원 부동촌(釜洞村)에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 이때 농민군들을 소 떼들을 앞세우고 공격해 갔다고 한다. 11월 14일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이어졌다.방아치를 중심으로 여원치, 관음치 등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 전체가 전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결과 관군도 30여 명이 전사하였지만, 농민군 측이 입은 피해는 더 컸다.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접주급 인물 5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였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운봉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박봉양은 11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농민군들은 완강하게 방어하였으나, 서문과 남문이 불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농민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생포했으며, 민보군도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84명이라 하였다.격렬했던 남원전투는 고남산을 중심에 두고 남원쪽에서 여원재에서 방아치로 방안치에서 유치로 이어졌다. 유치재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남원시 운봉읍의 매요리다. 매요리는 백두대간 등산로의 한 중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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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장군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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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방아치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고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이다. 1894(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담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공격하였다.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했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이때 민보군은 방아산 산성의 성돌을 중요한 무기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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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 백두대간 표지석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11월 중순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전투를 벌렸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 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의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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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홍 묘
유태홍(1867 - 1950)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그는 천도교(天道敎)인으로서 1919년 3월 2일 남원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그는 당시 남원읍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任實郡屯南面獒樹里)에 사는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李起東)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덕과면 사율리(德果面沙栗里)의 이기원(李起元)으로부터 이날 오전 9시경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았다.그는 즉시 장남인 유 석(柳錫)·천도교인인 김성재(金性在) 등 8명을 불러놓고 서울의 정황을 설명한 후 이들에게 9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주어 군내에 배포하게 하였다. 그들은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南原)지청 등 관공서 게시판에 독립선언서를 붙여 군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8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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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쪽뚤 표지석
쪽뚤은 1894년 11월 13일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전투였던 방아치 전투와 여원치 전투에서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진을 쳤던 곳이다. 남원의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의 민보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으로 그것을 기념하여 현재 비를 세워두고 있다.기념비의 정면에는 쪽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측면 오른쪽에는 현위치와 농민군이 깃발을 내걸었던 깃대바위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도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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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물 깃대바위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쪽둘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하던 과정 중에 주둔지 위쪽에 승전 결의와 표식을 위헤 깃발을 꽂은 곳이다. 이 바위에 두개의 홈을 파서 깃대를 세웠다고 한다. 농민군이 이곳에 주준한 목적은 방아치와 여원치의 두가지 공격로를 두고 민보군에게 혼선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