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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추모비
정병모(1872 - 1945)는 1919년 3월 26일 함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조사현(曺士鉉)·송대호(宋大浩)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곳의 유지인 조사현·송대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마침 국장에 참배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大洞面),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결국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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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묘
정병모(1872 - 1945)는 1919년 3월 26일 함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조사현(曺士鉉)·송대호(宋大浩)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곳의 유지인 조사현·송대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마침 국장에 참배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大洞面),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결국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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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3.1만세운동발상지 기념탑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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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항일운동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항일운동, 일본지역항일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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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방극용·형갑수 등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과 헌병이 무차별 발포하여 방진형(房鎭馨, 미상~1919), 방양규(房亮圭, 1879~1919), 방명숙(房明淑, 미상~1919), 김홍록(金洪祿, 1895~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황찬서(黃贊西, 1873~1919), 정한익(丁漢翼, 1890~1977)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해근(金海根, 1860~1946), 박정석(朴正錫, 1897~1933), 유창근(柳昌根, 1874~1938),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형기(李炯器, 1884~1936) 등 20여명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와 남원지역 청년회의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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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유적지 남원성 북문
이곳은 남원성 4대문 중 북문(공진루)터 앞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 농민군의 대도회소와 집강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방아치 패전후 세력이 급격하에 떨여져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승세를 탄 운봉,남원 연합의 민보군이 (음)11월 18일 남원성을 공격하였고 다시 패전한 농민군이 이 북문을 통하여 물러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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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구 묘
이석기(1879 - 1931)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조동선(趙東先) 등과 함께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덕과면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고, 6촌 동생 이성기·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의 비밀회의를 통하여 4월 3일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의 식수행사는 각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던 연중행사였기 때문에 일제의 의심을 받지 않고 사전준비가 가능했다. 이에 그는 3월 31일 회의석상에서 각 가정에서 반드시 1명씩 당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으로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도화곡에는 유례없는 식수기념일 행사에 8백여명이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난 다음, 그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하고, 이들의 앞에 나아가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으로 변한 행사참여자를 지휘하여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그는 길가에 있던 오백룡(吳伯龍)의 지붕위에 올라가서 격문을 낭독하고 20여장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여 헌병주재소 앞 큰길에 당도하여서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남원읍에서 헌병분견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증원 출동하여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조동선과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시위군중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서대문(西大門)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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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 이용기 형제기적비
이성기(1890 - 미상)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房極鏞)·형갑수(邢甲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체포된 덕과면(德果面)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李奭器)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가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廣寒樓)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이용기(1897 - 1933)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조동선(趙東先)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 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덕과면 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전례없이 많은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는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로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지만,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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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 묘
이성기(1890 - 미상)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房極鏞)·형갑수(邢甲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체포된 덕과면(德果面)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李奭器)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가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廣寒樓)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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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기 묘
이용기(1897 - 1933)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조동선(趙東先)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 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덕과면 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전례없이 많은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는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로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지만,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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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 충의기적비
황석(1848 - 1919)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전북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乙未事變)]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황석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전북도내 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돌려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장성(長城)에서 기우만(奇宇萬)이 거의할 때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점차 가속화되고, 러일전쟁 직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황석은 의(義)로써 적신(賊臣)들을 단죄하고자 고광순(高光洵)·이석용(李錫庸) 등과 수 차례 거의를 도모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소식에 자결하여 순국(殉國)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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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당고개 대한독립만세탑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식수기념일 행사 후 덕과면 일대에서 8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범수(李範壽, 1893~1945),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이준기(李俊器), 김선양(金善養), 이재화(李裁和)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사매면발전협의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9년 11월 17일 이 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