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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교회(3.1운동참여교회)
남전교회는 1897년 10월 15일에 설립된, 익산지역 최초의 교회다. 1900년 2월 21일[남전교회 당회록] 이윤국의 집을 ‘남차문교회’라고 부르면서 독자적인 예배 처소를 갖게 되었으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전킨(William M. Junkin)이 담임 선교사였다. 남전교회는 남학교인 도남학교(道南學校)를 1910년에, 여학교인 미성학교(美聖學校)를 1922년에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23년에 남녀공학인 신성학교(新聖學校)로 통합하여 1942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될 때까지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익산의 3.1운동인 솔내 4.4 만세운동은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만세 운동이었다. 만세 운동 전날에는 남전교회 교인들이 대형 깃발과 현수막,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남전교회 교인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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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올교회(3.1운동참여교회)
여올교회는 호남 지역에 온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현지인을 통해 1903년에 교회가 설립 되었다. 정확한 설립 시기, 명칭, 설립자는 알 수 없지만 적상면 괴목리에 개척된 한 교회가 1903년에 새내라고 하는 동네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늘갓(지금의 여원리)에 살던 전찬중과 한윤성이 이 교회를 다녔는데, 늘갓에 교인이 늘어나자 1906년에 늘갓의 전찬중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늘갓 교회, 즉 현재의 여올교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10년 마을 뒷동산 중턱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첫 헌당식을 하였다. 3·1 운동 전해인 1918년에는 늘갓 교회에 세운 삼숭 학교를 통해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삼숭 학교에는 무주뿐만 아니라 진안, 금산, 장수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학문을 배우고자 몰려들어 전성기 때는 8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3월 1일의 만세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전일봉(全日奉) 장로가 4월 1일 무주 장날 새벽에 나뭇짐을 실은 달구지와 장짐에 태극기를 숨겨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읍내 장터로 진입하여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7회에 걸쳐 3,500여 명이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전일봉 장로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에도 꾸준히 전도 활동과 애국 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지금도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4월 1일이 되면 무주 장에서 만세 운동 기념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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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지곡교회(3.1운동참여교회)
군산지곡교회는 1907년에 창립되어 1915년에 지곡동 290-2에 교회를 건립하였다. 군산지곡교회는 민족 구국 운동인 3·1 운동에 함께 한 교회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 횃불은 군산에까지 타올랐다. 군산 만세 사건을 주도한 것은 영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이때 영명 학교 학생이었던 지곡 교회 소속 전세종 학생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지곡 교회 소속 고창록 학생 역시 군산 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했다. 지곡 교회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내던지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밝히 드러냈던 선배들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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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장수군)
장수군 3.1운동기념공원은 2021년 3월 1일 조성되었는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공헌한 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기념공원 내부에 3.1운동기념비가 있는데, 기념비를 중심으로 양옆에 장수군의 독립운동가들의 성함이 적혀있는 조형물이 있다. 장수군은 3.1 독립선언의 33인 민족대표 백용성과 문태수, 전해산, 박춘실, 김동신 의병장 등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희생하신 순국선열을 배출한 지역이다. 장수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5일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년 3월 19일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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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산서)
장수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5일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 장날 박정주·안성섭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사계리에서 주민 20여명이 사계산 시위를 벌이고, 양일표·빈영섭·유동렬 등의 준비로 3월 26일 산서면 오성리에서 주민 수백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들 시위로 김형택, 박기영, 박정주, 빈영섭, 신동개, 안성섭, 양일표, 유동렬, 이길선, 이상욱, 이화백, 장재만, 정호현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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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수탈현장 안내판
화호리는 숙구지라고 불리었던 곳이며, 광활한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지배층의 착취와 일제강점기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다. 화호리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식산은행에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아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로 땅을 사들이거나 고리대금업을 통해 농토를 빼앗아 조선의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하였다. 생존문제에 봉착해야 했던 식민지 조선의 농민들은 식민지 거대지주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식민지적 사회구조가 고착되어 갔고, 식민지 조선 경제에서 수탈이 주요한 하나의 측면을 이루고 있었으며, 수탈은 생산수단이 일본인에게 집중되고, 산출되는 이익 또한 일본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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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술 배향사원 창동서원
창동서원은 후창 김택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1965년 지역 유림들이 세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서원 내부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와 강당, 직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후창집의 사본과 석판본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다. 김택술(1884-1954)의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이며, 일제의 통치를 거부해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후학 교육에 힘쓴 유학자이다. 17세 때 천안 금곡에 있는 전우(田愚)를 찾아가 수학하여 후창이란 호를 받았다. 1906년 최익현(崔益絃)의 태인(泰仁) 창의(倡義)에 참가했으며, 송병선(宋秉璿)·김복한(金福漢)과도 사귀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효로서 이름을 알렸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 꾸짖으며 물리침)했고, 또 큰 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하였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공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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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기적비
김승옥(1889~1964)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오동균(吳東均)·김창규(金昌奎) 등과 함께 고창읍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오동균과 함께 독립선언서·국민휘보(國民彙報)·조선독립가(朝鮮獨立歌) 등의 문서를 구입하여 이를 다량으로 등사한 후, 읍내 유지 및 학생들과 연락하여, 고창 장날인 3월 1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누설되어 예정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였지만, 3월 21일 오전 11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한 후,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도중에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더욱 기세를 올려 군청으로 행진해 가서, 군수와 군청 직원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이해 5월 22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26년까지 고창군 청년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사상의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자녀들에게는 민족혼과 애국사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애국지사 이름인 김 일(金一)·김 구(金九)로 호적을 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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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기념관(정시해 기념관)
정시해(1872~1906)는 면암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신이다. 1906년 4월 호남에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는 의보(義報)를 받고 면암의 친서(親書)를 영남지사들에게 전달하여 영남에서 면암의 의거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면암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병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6월 5일 임병찬, 김기술, 유종구, 김재귀, 강종회 등과 부서를 나누어 관장하고, 정읍(井邑)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고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한 후 6일 순창에서 무력을 증강하여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회군하여 오산촌(鰲山村)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 접전에서 중군장의 임무를 맡은 정시해는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시해는 임종할 때 면암에게 '시해는 왜놈 하나도 죽인 일이 없이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라도 선생을 도와 적을 죽이겠습니다.' 하고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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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승 민족정신 선양비
정인승(1897 ~ 1986)은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이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후 독립의 길이 국어국문의 수호와 발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사전편찬회의 주무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어의 보급과 한국문의 출판을 일체 금지하여 한국어말살정책을 야수적으로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여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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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경 추모비
박도경(1874 ~ 1910)의 본관은 밀양이고 대대로 모양(牟陽, 지금의 고창)에서 살았다.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의진을 일으켜 모양현의 무기고를 기습, 무장한 뒤 의병 투쟁에 나서 교전하으나 패했고, 이후에는 성재 의진 소속으로 전남 각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의병장인 성재 기삼연이 1908년 1월 순국한 뒤 의진을 지휘하는 포사장이 되었으며,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 순국하며 형세가 어려워지는 와중에도 광주와 장성, 대체로 남포(藍浦)·부안(扶安)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 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上西面)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가협(加峽)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다. 체포되어 구금된 중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받았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 받았다.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기각, 그해 2월 22일 상고기각, 3월 18일(음력 2월 8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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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파리장서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37분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무단 식민통치를 강하게 규탄하고 민족독립을 강조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여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열린 파리만국평화회의의 대표단을 비롯해 국내외에 대거 배포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을 일컫는다. 현재 파리장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 전국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고창의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는 고창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네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파리장서 서명 이외에도 의병활동 및 계몽활동, 포고문 작성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독립운동을 해 나갔던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