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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조 묘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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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조 사적비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 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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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천 사적비
서정천(1917 - 1966)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서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하여 전방에서 광복군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 제 5전구 소속 전시간부훈련단(戰時幹部訓練團)에 특설한 정공간부훈련반(政工幹部訓練班) 제 2기생으로 입교하여 3개월 간의 정훈교육을 받았다. 1945년 3월 호북성(湖北省) 담현(潭縣)에서 초모공작 및 적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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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사적비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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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집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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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춘 묘
함연춘(1901 - 1974)은 전북 전주군(全州郡) 전주면 남문(南門) 밖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함연춘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재학 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후 1시경 전주면 남문 밖 시장 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남문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부근까지 행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함연춘은 1919년 9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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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집
정화암(1896 - 1981)은 일제강점기 흑색공포단, 항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 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정철연(鄭轍淵)이고 아버지는 정환전(鄭桓全)이다. 외조부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흔계(姜昕季)이고, 처부는 김제조씨(金堤趙氏) 조응식(趙膺植)과 수원백씨(水原白氏) 백원보(白元普)이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8월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건의하려다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조국광복운동은 혁명적 무력투쟁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협의하였다.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11월에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로 오면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해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 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한 5만 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는 한편, 중국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해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했으며,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푸젠성[福建省] 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 때까지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 때 일본군의 수송로를 폭파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생포된 연합군의 포로를 구출하는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 군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 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회고록』이 있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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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렬 구 묘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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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렬 추모비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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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집
함태영(1872 - 1964)은 일제강점기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1873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아버지는 함우택(咸遇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격동하는 내외정세 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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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출생지 기념비
함태영(1872 - 1964)은 일제강점기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1873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아버지는 함우택(咸遇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격동하는 내외정세 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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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상 순절비
김영상(1836 - 1911)은 조선 후기 일본 왕의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여 수감 중 단식하여 순국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영상(金永相)은 183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김경흠과 나주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6세에 고향인 정읍 칠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사하여 18세에 인척인 김인흠, 23세에 김기에게 수학하고, 50세에 소휘면(蘇輝冕)의 제자가 되었으며, 기정진 · 송병선(宋秉璿) 등과도 교유하였다. 1911년 5월 9일 옥중에서 단식, 순국하였다. 김영상은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장리(掌理)로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빼앗기자 70세의 고령임에도 최익현 ·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06년 6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총참모장이 되어 지역 유생들을 참여하게 하였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1907년 태산사(台山祠)를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때 김영상은 유림들의 요청으로 태산사 상량문을 지었고 한동안 태산사에 머물렀다.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10월 노인들에게 은사금(恩賜金)을 주려 하자 “대한신민(大韓臣民)이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를 수차례 거절하면서 사령장에 적힌 자신의 성명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1911년 5월 일제가 일왕을 모독한 불경죄로 그를 체포하여 동곡헌병대에 구금하였다가 군산으로 압송할 때 만경강 사창진(沙瘡津)에서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나, 헌병이 그를 구출하여 실패하였다. 군산 감옥에 투옥된 그는 단식 끝에 7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45년 김환풍 · 안항섭 등이 발의하여 김영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필양사(泌陽祠)를 건립하였다(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51-1-19, 관리자: 필양사보존회). 1978년 지역 인사들이 김제 만경강 사창진에 「춘우정투수순절추모비(春雨亭投水殉節追慕碑)」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