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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멸왜운동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무인 멸왜 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 기도 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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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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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희 기념비(서문교회)
배은희(1888∼1981)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출신의 목회자이다. 1919년 평양 신학 전문학교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전주 서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호남 지방 최초의 유치원인 전주 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전주 지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복음 전도단을 결성하여 농촌 교회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시 체제기에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장로교 교단이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목회자들이 창씨개명을 강제했을 때,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목회 활동을 중단하였다. 배은희는 8·15 광복 후인 1945년 전라북도 치안 대책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고, 신탁 통치 반대 투쟁 위원회 경상북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1952년 2월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 이후에 공화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정계를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1955년 일한 도서 주식회사에서 출간한 『나는 왜 싸웠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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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마을 소나무, 당산나무(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선포 지역)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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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금정 바위(동학농민군 진격로)
첨금정(沾衿亭) 바위는 예향천리 마실길에 위치한 동학농민군 진격로 중 하나이다. 논 가운데에 첨금정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이기도 하다. 바위에 '萬歷二十五年十月 日 統制使李舜臣銘 宣武原宗功臣 金海金公 緯,한,天貴,殉節'(만력 25년 10월 일 통제사 이순신 명 선무원종공신 김해김공 위, 한, 천귀, 순절)이라 새겨져 있다. 1923년에 발행된 무장읍지에 '첨금정은 재향 동5리에 위치하며 암석과 수목이 있는 곳으로 정인(征人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과 송별시 일가족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며 옷깃으로 눈물을 적신 곳'이란 기록이 있다. 이러한 명칭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정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김해김씨 장사군 파보와 선무원종공신록권(만력 33년 4.16, 1605)을 살펴보면 임진왜란때 진도 싸움에서 적의 독화살을 맞고 장열한 죽음을 당한 강동현령 김위의 반장시 이순신 장군이 참석하여 장례를 치룬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또한 김위를 비롯하여 아버지 천록, 할아버지 수연, 동생 현, 혼, 사촌 8명등 조,자,손, 3대 13명이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관련하여 공신록에 등제되어 있음도 볼 수있다. 이곳 들녁 이름도 첨금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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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사신원)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사신원에 대한 안내판이다. 고대부터 교통기관의 하나로써 이용됐던 사신원은 고려, 조선시대 때 숙박, 통신, 교통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특성으로 인해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끄렁재와 사신원 그리고 인천강 사이에서 하룻밤 묵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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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동장학당
백관수는 한일 합방이 되자 전국에서 96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흥동 장학회를 조직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됐던 흥동장학당은 항일 애국지사들의 넋이 서린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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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정(동학군 숙영지)
전북 고창에 있는 동학정은 동학군이 숙영(군대가 병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는 일, 훈련의 일종)했던 곳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세워진 정자이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군, 정읍시, 장성군, 영광군, 무안군, 함평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불리었으며, 휴식처(윷판두재), 식수터, 마을 주변에 존재하는 20여 개의 벙커와 땅굴 등이 보존되어 있어 문화적,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고창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일어난 각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옮아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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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탱화의 태극기
탱화는 천이나 종이에 부처, 보살, 성현들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를 말하는데, 남원 선원사 명부전에 지장시왕도 괘불탱화가 있다. 지장은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며, 시왕은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을 의미한다. 명부전은 사람이 죽은 뒤 살아있을 때의 일을 심판받는 명부를 상징하는 곳으로,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신령과 부처가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따라서 사후에 10번의 재판을 주관하는 10명의 왕들을 모신 전각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인데, 제 6대 왕인 변성대왕 관모에 태극기가 그려져있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뇌록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8.5cmX3cm이다. 화기에 따르면 1917년 11월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 시대의 태극기 문양과 같아서 독립을 바라는 불교계의 서원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10년대 탱화 제작 등 모든 예술 행위가 일제에 의해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을 피하고자 지장시왕도가 제작된 이후에 작게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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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서두교회(3.1운동참여교회)
서두교회는 1898년 설립되었으며, 익산 지역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한 교회이다. 서두교회는 1898년 11월 서두리에 살던 주민 정정보가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 소속 최의덕(미국명: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기도처를 마련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3년 10월 10일 정식교회가 설립되고, 루터 멕커첸 선교사가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삼신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말로 신앙 교육과 일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익산 3.1운동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익산 3.1운동은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고, 기독교 조직과 연계하여 두 종교가 함께 주도한 점이 특징인 3.1운동이며, 특히 1919년 4월 4일 시위에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할 만큼 큰 규모의 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의 군중이 체포되었다. 이날 서두교회의 박병렬 장로도 시위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후 박병렬 장로는 맥커친 선교사의 항의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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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교회(3.1운동참여교회)
대장교회는 익산군(현, 익산시) 춘포면에서 1902년에 시작되어 최순표와 최재연이 모여 예배를 드리다 1905년에 예배당을 세웠다. 예배당이 세워진 춘포면은 호남평야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미곡 창고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대장교회는 민족의식이 강한 교회로 예배당에 노동야학을 열고 지역 주민들에게 조선어 강습을 실시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1919년 4월 4일 솜리 구시장에서 열린 만세 운동 당시 판문교회(대장교회) 교인 박도현은 남전교회관련항목 보기 문용기와 함께 4월 4일 만세 운동을 이끌다 순국하여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3.1운동 참여교회임을 공인하고 현판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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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교회(3.1운동참여교회)
1906년 설립된 제석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익산 지역의 3.1운동을 이끈 민족교회이다. 1908년 홍종필이 기증한 곱패집은 ㄱ자 모양으로 남녀가 분리되어 예배를 드린 초기 한국교회 중 하나이다. 1909년 홍종익과 홍종필은 부용학교를 세워 100명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이들은 군산선교부가 운영하는 군산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제석교회는 1919년 3월 10일 웅포, 함라, 함열, 용안, 강경 일대의 만세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제석교회가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강경 3.1운동 시 제석교회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엄중칠은 강경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형오는 함라·웅포 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엄창섭은 강경 장날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제석교회 출신들이 3.1운동을 주도한 후 일본 경찰은 종탑을 부수고 교회종을 빼앗고, 성경을 불태웠으며, 부용학교를 강제 폐쇄하고 일본 소학교로 강제 수용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제석교회를 남전교회와 함께 ‘익산 지역 3.1운동 사적지’[한국기독교사적 제19호]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