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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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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인 집
심재인(1918-1946)은 1938년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0년 4월, 임우칠(林友七)의 집에서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2년 이상만 등이 밀회를 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노출되어 80여 명의 동지들이 붙잡히자, 그도 연루자로 붙잡혔으며,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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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인 묘
심재인(1918-1946)은 1938년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0년 4월, 임우칠(林友七)의 집에서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2년 이상만 등이 밀회를 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노출되어 80여 명의 동지들이 붙잡히자, 그도 연루자로 붙잡혔으며,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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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상선 묘
어상선(1889-1967)은 1920년 음력 8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특파원의 권유로 독립운동자금 5백원을 제공하였고, 1921년 평남 영원(寧遠)에서 항일비밀결사 대한계흥단(大韓繼興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및 동지 포섭 활동을 펴다가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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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면 독립만세운동 터 표지석
상리면 독립만세운동 터 표지석은 경남 고성에 있으며, 1919년 3월 28일에 일어난 상리면 독립만세운동의 터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세워진 표지석이다. 상리면 독립만세운동은 오산리 삼거리에서 전개되었는데, 한일동, 한기원, 진택성, 진정성, 진윤성, 진구성, 진갑성, 진인성, 진익성 등을 중심으로 50여 명이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인 것을 말한다. 상리면 독립만세운동 터 표지석 근처에는 오산 버스정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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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 집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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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순 사적비
강영순(1882 - 1939)은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강영순의 이명은 강한순(姜瀚淳), 강백문(姜伯文)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진주군 정촌면(晋州郡井村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병홍(李炳洪)이 강재순(姜在淳)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정황을 전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이때 그도 이 소식을 듣고 강재순·허현(許炫)·이종락(李鍾洛)과 더불어 협의한 결과 정촌면민들도 진주읍민들과 함께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진주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고, 이종언(李鍾彦)에게 독립선언서를 판각하여 등사하도록 하는 한편 인근 진주의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각지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3월 18일 그는 5천여 명의 대대적인 정촌면 시위군중과 함께 진주읍내로 시위행진하였다. 도중에 사천(泗川)의 일본군 헌병대와 진주의 일본군 수비대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칠암리(七岩里)에 도착했을 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화 충돌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남달리 힘이 센 그는 한손에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한손으로 일본 헌병의 칼을 빼앗아 남강(南江)에 던지며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진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던진 포승줄에 목이 감긴 그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시위군중의 필사적인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주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포승을 절단하고 일본 경찰 2명을 발로 차 쓰러뜨린 뒤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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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순 집
강영순(1882 ~1939)의 이명은 강한순(姜瀚淳), 강백문(姜伯文)이다. 진주군 정초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병홍(李炳洪)이 강재순(姜在淳)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정황을 전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강영순(1882-1939)도 이 소식을 듣고 강재순·허현(許炫)·이종락(李鍾洛)과 더불어 협의한 결과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진주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3월 18일 5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진주읍내로 시위행진하였는데,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화 충돌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강영순은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였고,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강영순은 결국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이후 호송되는 도중에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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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순 묘
강영순의 이명은 강한순(姜瀚淳), 강백문(姜伯文)이다. 진주군 정초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병홍(李炳洪)이 강재순(姜在淳)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정황을 전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강영순(1882-1939)도 이 소식을 듣고 강재순·허현(許炫)·이종락(李鍾洛)과 더불어 협의한 결과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진주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8일 5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진주읍내로 시위행진하였는데,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화 충돌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강영순은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였고,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강영순은 결국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이후 호송되는 도중에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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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권 집
정세권(1888-1966)은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동(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희사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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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권 구 묘
정세권(1888-1966)은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희사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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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복 묘
이금복의 남편은 1932년 6월경 ‘삼천포독서회사건’으로 도피 중이었고, 이금복(1912-2010)은 남편의 동생 박대홍(朴大鴻)의 권유로 「별의 나라」 · 「집단(集團)」 등 사상 서적을 읽고,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34년 8월, 목도조선법랑철기주식회사(牧島朝鮮琺瑯鐵器株式會社)에 여공으로 취직하였고, 이때 정충조(鄭忠朝)의 권유로 동지 박보홍(朴寶洪)·이춘근(李春根)과 함께 정호영(鄭鎬永)의 검거 이후 분산된 적색노동조합을 재조직하기 위한 실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고, 이후 삼천포를 중심으로 적색농민조합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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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순 묘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