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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규 묘
애국지사 학산 조성규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한 뒤, 조경식(趙璟植)·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 )·조정래(趙正來)·조상규(趙相奎)·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피신하여 다시 군북장날인 3월 2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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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규 비
조상규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한 뒤, 조경식(趙璟植)·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 )·조정래(趙正來)·조상규(趙相奎)·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피신하여 다시 군북장날인 3월 2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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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도 묘
김김삼도 선생은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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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엽 묘
박상엽 선생은 경남 함안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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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13충 독립유공자 공적비
함안 조씨 문중에서는 총 90여 명의 독립 유공자가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기에는 순의한 7명을 포함 13명의 충신이 구국 투쟁에 나섰다.이 비석들은 독립운동과 항일 투쟁에 몸담았던 함안 조씨 문중의 여러 의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비석 뒷면에는 독립운동가 박시창 선생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양손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양기탁 선생의 손녀사위로 국가보훈처장 및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박유철 광복회 회장이 헌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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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원 묘
조용원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함양으로 돌아온 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 등은 대산면(大山面)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함께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거사 당일인 3월 19일 정오경, 주도자들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오후 2시, 조용원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馬山)경찰서 일경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이 응하지 않자 구타하기도 하였다.이어 조용원은 시위군중들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체국·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 등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 전화선을 끊었다. 그러나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긴급출동하였다. 이들은 현지 일경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도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8월 15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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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3.1독립운동기념탑
군북3.1독립운동기념탑은 군북지역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4.03.01 건립한 탑이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동상, 방명록 등의 조형물이 함께 있다. 기녑탑은 높이 21M로 21세기를 상징하였고 중앙 하단에는 위패실이 모셔져 있다. 군북의 상징인 백이산, 방어산, 삼봉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주탑과 중앙에는 선비의 올곧은 자긍심과 선열들의 혼백이 승천하라는 의미로 촛불을 형상하였다고 한다. 군북면의 3.1운동 시위는 당시 5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군북 장날에 일으킨 대규모 시위였으며 52인의 열사와 의사, 지사들이 운동으로 인해 순국하고, 옥고를 치르는 등 강력하게 제압당한 사건이었다. 1919년 유림을 중심으로 군북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다. 3월 10일 서산 서당에서 주동자들이 모여 군북 장날인 3월 20일(음력 2월 19일)에 총 궐기하기로 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경 주동자들과 학생 50여 명이 신창 야학에 모여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 선언문을 나뭇짐에 숨겨 거사 장소로 운반하였다. 오후 1시 군북 냇가에는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나누어 갖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상인과 장꾼들이 합세하니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불어나고 군북 왜경주재소를 포위압박 돌을 던져 공격하니 왜경은 혼비백산하여 마산 왜경과 진해 경포병대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출동한 왜군경은 시위 군중에 먹물을 뿌리며 무차별 사격을 가해왔다. 이로 인해 2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수십 명이 체포되어 대구와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부상자는 부지기수이며 먹물 묻은 시위자를 무차별 체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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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식 묘
조경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한 뒤,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피신하여 다시 군북장날인 3월 2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1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대구(大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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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호 묘
우봉 안지호 선생은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咸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감부(統監府)와 일본 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차례 구금되었으며, 1910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朝鮮總督)인 사내(寺內)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내었다가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馬山)지청에서 징역 3월에 2년간 집행유예형을 받기도 하였다.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한문교사로 있던 그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의 배후 고문 역할을 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같은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연락하였다.이에 따라 3월 19일 정오부터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장터를 출발하여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도처에서 일본 군경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후 그는 이곳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부산감옥 마산분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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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항일운동기념비
주민 200여 명이 면수면사무소에 모여 학교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는데 이전에 호의적이던 면장도 직책상 이전을 찬성하였고 이에 민중들은 면장을 납치하여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 의령읍까지 진출하는 도중에 일경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위군중은 강제 해산되고 시위를 주동한 지사 29명은 체포되어 함안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특히 이 중 17명의 지사는 11월 21일 부산법원에서 공무집행방해, 상해죄로 6개월부터 1년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날의 항일운동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이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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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혁중 묘
안혁중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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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흠 묘
이경흠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