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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권 비
김홍권 선생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1909년에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김사용(金思容) 김기수(金基洙) 윤병호(尹炳浩) 서상일(徐相日)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단체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지하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피임되었으며, 4월 23일, 2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2차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차장제의 폐지와 위원제 사용의 결의, 각 부 위원의 선정, 임시 의정원 성립 반포(頒布) 등이 결의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6일에는 제4차 임시의정원의 의결에 따라 윤현진(尹顯振) 조동진(趙東珍) 등과 함께 경상도 지방의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모집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 인두세의 징수, 내외에 공채모집 등의 안건이 결의되었던 것이다. 의연금의 모집 방법은 각 의원이 먼저 내고 다음에 국내에 모집위원을 파견하고, 그리고 상해에 오는 동포에게 받아서 임시정부의 자금 확보의 재원으로 삼아 항일 독립 활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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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추모탑
하동군 옥종면 항일투사추모탑은 제70주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투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2015년 8월 15일 건립되었다. 옥종 뿐 아니라 진주, 산청, 옥종, 청암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을 모두 추모하고 있다. 약 1억여원(군비 7000만원,자비 3000만원)을 들여 준공하였으며, 높이 10m로 광복의 횃불을 든 형상이며, 추모탑과 함께 별도로 마련된 명단석에는 옥종면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투사 158인의 추모의 글을 새겼다. 이 곳에 새겨진 인물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항일의병대인 경남창의대의 중군장 양문칠, 후군장 류명국, 그리고 손기혁, 김내순, 김용이, 권석도, 손마생, 송치도, 신석원, 양자익, 이겸로, 이만영, 이백인, 이상수, 임봉구, 장석현, 장세경, 조인환, 추교문, 황의중, 권태형, 이도윤, 이수호, 정남시, 주무준, 조정래, 조학제, 하일로, 화진선, 권대섭, 권복태, 권상숙, 김중수, 정화영, 조성래, 조양래, 최인우, 하계원, 하성백, 하형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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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1894년에 궐기한 동학농민군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고자 세워진 사적이다. 1894년 경상남도의 농민군은 고성산성에서 집결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현장에서 농민군 수천 명이 죽었다. 그러나 일본군 보고서에는 186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쓰여있다. 고성산성은 당시 순수 동학혁명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곳으로, 고성산 능선을 따라 곳곳에 암벽이 남아 있고, 정상부근에는 동학혁명군이 축조한 석루와 혁명군 지휘자들이 군사회의를 개최한 듯한 탁자와 의자 모양의 돌 유적이 존재한다.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높이 15m의 첨탑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첨탑은 고난과 시련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 탑 하단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잘 정리하여 새겨놓은 비문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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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준 사적비
조무준 선생은,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41년 1월 일본 구주의학전문학교(九州醫學專門學校) 3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으로 유학온 한국인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동지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9월에 열린 유학생의 신입생 환영회 및 송별회에서 일제의 패전은 필연적으로 조국독립은 이때 달성되어야 함을 각성시키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역설하면서 활동하다가 1941년 10월 21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1942년 5월 7일 기소되었다. 애국지사 조무준 사적비는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67번지 함월정 인근에 위치한다. 이에 1942년 11월 9일 복강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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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화 집
1919년 3월 18일 경남 하동군(河東郡) 하동읍(河東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치화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3월 14일 하동군 적량면장(赤良面長)의 직책을 사직하였다. 3월 18일 오후 3시 경 하동읍의 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다수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고무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박치화는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1919년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서 1919년 7월 3일 상고 기각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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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화 공훈비
박치화(朴致和)는 1919년 3월 18일 경남 하동군(河東郡) 하동읍(河東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치화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3월 14일 하동군 적량면장(赤良面長)의 직책을 사직하였다. 3월 18일 오후 3시 경 하동읍의 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다수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고무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박치화는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1919년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서 1919년 7월 3일 상고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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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홍 묘
하동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 18일 하동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행적을 알 수 없었던 죽헌(竹軒) 이병홍(李炳鴻·1896∼1919)의 묘소이다. 이병홍 지사는 1915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3년 졸업 후 하동읍내에서 대서소(代書所)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박치화(건국훈장)·정낙영(대통령표창)·이범호(대통령표창) 등 12명과 자신이 운영하던 대서소에서 은밀히 모여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월 18일 하동장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 150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주동자로 몰린 박치화는 일본경찰에 연행돼 진주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사무실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이용한 이병홍 지사는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박치화는 항소했으나 이병홍은 항소를 포기하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출옥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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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학 묘
최제학은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진안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면암은 판서 이용원·김학진·관찰사 이도재·참판 이성렬·이남규 등에게 글을 보내어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면암은 제자들과 의논하여 태인에 있는 돈헌 임병찬과 제휴하기로 하였으며, 이어 1906년 3월 3일 최제학은 면암의 서신을 가지고 돈헌을 찾아가 일을 성사시켰다. 이에 면암은 최제학 등 문인과 함께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회동하여 유생 80여 명의 호응을 받아 6월 5일 정읍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하고, 6일 순창으로 들어가 무력을 보강하고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다시 회군하여 오산촌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돈헌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가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 틈에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면암의 곁에는 20여 명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의병들이 대항하지 않자, 적은 포위망을 좁혀 왔으며, 이튿날 전원을 경성으로 압송한다는 황제의 칙명을 전달하였다. 이 때에는 면암과 최제학을 비롯한 13인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전주를 거쳐 6월 18일 경성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김기술·문달환 등은 석방하고, 최제학·고석진은 구류 4개월, 그리고 면암과 돈헌은 8월 하순 대마도 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최제학은 1907년 1월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의 운구에 참여한 후 지리산 중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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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유공자 추모비(하동군 청암면)
하동군 청암면에 세워진 항일독립운동추모비는 이 고장의 만세 운동에 참여하신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1995년 8월 15일, 하동군 청암면 친목 단체인 청암정우회가 앞장서서 추모비 건립하였다. 하동군 청암면 출신인 항일 독립 유공자 김기범, 정재옥, 정남시 등 3명의 항일 운동 내용을 정리하여 비에 새김으로써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하동군 청암 출신 독립 유공자들의 애국 애족심을 함축하여 시(詩)로 잘 표현하고 있으며, 추모의 엄숙함도 함께 갖춘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동군 청암면의 삼일운동시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독립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인 김기범, 정재옥, 정남시(鄭南時), 하형수(河炯壽), 권대형(權大衡)·이수부(李壽溥)·이현주(李鉉周) 등은 1919년 4월 5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그해 4월 7일 하동군 청암면 일대에서 시위를 전개한 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6개월에서 1년의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수부, 이현주, 하형수 등은 1919년 4월 8일 태형을 언도 받았고, 화진선은 6개월형이 언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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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하동지회 표지석
하동청년회관은 하동지역 청년운동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이 회관은 3·1정신을 계승하여 민중계몽, 독립정신 함양 등 향토의 민족교양강좌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자 1926년 하동청년동맹이 앞장서고 독지가들의 출연으로 하동읍 읍내리 441-1번지에 건립하였다. 1927년 8월 20일에는 하동청년동맹이, 1927년 10월 20일에는 신간회 하동지회가 창립식을 갖는 등 하동지역의 청년운동과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후 일제는 이 회관을 하동청년단체의 독립운동 장소로 여겨 하동읍 공회당으로 쓰도록 건물 용도를 변경하였다. 광복 후에는 고등공민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하동문화원 건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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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항일독립기념탑
이 곳은 국가보훈부 지정 국가현충시설로, 하동 지역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기리기 위하여 2014년 삼일절에 준공되었다. 하동항일청년회관, 하동 항일독립운동 약사, 대한독립선언서 비,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등의 조형물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건립 취지문, 헌시, 하동지역 독립유공 서훈자 명단 등을 기록한 비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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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 의총
일제 강제병합이 있기 2년 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하며 결사 항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 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 역사관 뒤 능성)에 초병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길목(발 등 덮개)을 만들게 하고 음력 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철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 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 공격을 했다. 항일 의병 80여 명 중 50여 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 때 주민 일부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등, 전평전 및 계곡 산 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 곳 30명의 무명 항일 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봉분이 훼손됨에 안타까워 하동 군민의 정성을 모아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삼가 항일 의병 비를 세웠다.